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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식 (HK교수/ 연구분야 : 한국 근세사, 한일 관계사)

논문
논문초록 
임진왜란 시기 경상도의 산성 축조와 전투
(지역과 역사 33, 2013. 10)

임진왜란 시기에 경상도의 낙동강 유역에는 山城이 집중적으로 축조되거나 보수되었다. 임진왜란 때 주요 산성 전투는 경상도 지역에서 이루어졌는데, 조선군에 승전과 패전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시기에 축조된 산성은 전쟁을 극복하는 데 전술과 전략 면에서 많은 기여를 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에 축조된 산성은 전술적으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주력 화기였던 鳥銃을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으로 널리 채택되었다. 아울러 산성을 활용한 방위법은 우리나라 전통의 방어 전략이 실현 가능성이 있으며, 또 우수함을 확인받은 대표적인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개항기 해항도시 부산의 절영도진 설치와 운영
(역사와 경계 90, 2014.03)
조선시대에 東萊府에 속한 가장 큰 섬이었던 절영도가 개항기에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에 釜山은 유일한 海港都市였지만, 개항을 전후하여 제국주의 세력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교류가 나타났다. 조선시대까지 絶影島에는 牧馬場, 神祠, 漁場, 假倭館이 있었다. 특히 절영도는 設鎭 이전에 국가의 주요 목마장으로 사용됐지만, 조선후기에 외국 선박이 출현하면서 부산항의 咽喉라는 지리적인 요인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시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개항기에 부산에는 일본인의 거주가 증가하였으며, 일본은 기존의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전관거류지를 설정하였다. 일본은 절영도에 불법적으로 病幕을 설치하였으며, 貯炭所를 설치하여 사용했다. 청나라와 영국도 부산에 영사관을 설치하였으며, 러시아도 절영도에 저탄소 설치를 청원하였다. 이러한 외세에 대비하고 개항장을 지키기 위한 국방상의 필요 때문에 1881년 절영도 中里에 水軍僉使의 鎭을 설치하면서 부산의 包伊, 開雲, 西平 3개 鎭을 혁파하였다. 절영도진은 設鎭 후 獨鎭으로 기능하였으며, 1895년 군제개혁으로 폐지되었다. 절영도진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으므로 운영에 반영되었다. 절영도진의 첨사는 15년 동안 13명이 재임했는데, 첨사직은 영전해 가는 중요 자리였다. 절영도진의 첨사는 좌수사의 관할 아래 있었지만, 감리서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절영도진에 소속된 군사는 440명이었으며, 전선에 속한 元防軍은 3,618명이었다. 절영도진의  戰船은 2척이었는데, 각각 兵船 1척과 伺候船 2척이 배속되었다. 절영도진의 운영 수입을 錢으로 환산하면 전체 11,326냥이었지만, 上納分을 제외하면 집행 가능한 실제 수입은 7,522냥이었다. 절영도진의 지출은 廩況 3,852냥, 砲米 367냥 등이었다. 개항으로 부산이 해항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절영도진은 외세 방어를 위해서 설치되었다. 이에 절영도는 기존의 牧馬場에서 군사 防禦鎭으로 변하여 기능을 하였지만, 廢鎭 이후에는 외세의 租借地가 되고 말았다.
이충무공전서의 편찬 배경과 내용
(이순신논총 22, 2013.12)
이 글은『李忠武公全書』의 편찬 배경과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기 위해 작성된 글이다.『이충무공전서』는 조선시대에 正祖의 명으로 1795년에 14권 8책으로 간행되었다. 正祖는 이 전서의 서론에 해당하는 綸音과 神道碑名을 직접 지었으며, 발간 비용을 지원하였다. 정조가『이충무공전서』의 간행을 지시한 1792년은 天主敎 문제로 사상 논쟁이 일어났던 혼란한 시대 상황이었다. 정조는 사상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老論의 정신적 지주인 宋時烈을 文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한편으로 이순신을 武의 상징으로 내세워 노론 중심의 정치적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다. 아울러 이순신을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극복의 민족적 영웅이라는 차원보다는 군주에 대한 의리를 다한 忠臣의 상징으로 내세워 왕조의 체제를 안정․유지시키는 방편으로 삼고자 했다. 『이충무공전서』는 총 1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에는 綸音, 碑銘, 卷首가 편차되어 있다. 주목되는 점은 보통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곳에 정조가 1792년과 1793년에 내린 세 편의 綸音이 있다는 점이다. 碑銘은 1794년에 세운 신도비의 비명으로 正祖가 직접 지은 것이다. 卷首에는 敎諭, 賜祭文, 圖說, 世譜, 年表가 있다. 권1~4는 詩, 雜著, 狀啓이다. 권5~8은 亂中日記인데, 이 전서 가운데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권9~14는 附錄으로 내용은 紀實인데, 중국과 우리나라 사적에서 저자 관계 기록을 뽑아 모은 것이다. 맨 끝에 문집의 간행에 관한 尹行恁의 跋文이 별도의 항목은 아니지만 첨부되어 있다. 이 또한 다른 문집들과는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이충무공전서』의 의미는 왕명을 받고 국가적인 사업으로 완성한 만큼 조선시대 출판문화에 있어서 하나의 표본이 되는 典籍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순신 개인의 傳記 자료로서 충분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사 연구에서도 빠질 수 없는 귀중한 1차적 문헌이다. 그리고 龜船과 같은 제도의 원형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소중한 전거가 되는 책이다.
임진왜란 시기 창녕 지역의 대응과 후대의 기억
(한국사상사학 46, 2014.04)
임진왜란 시기에 창녕 지역은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진격로와 운송로였으므로 침입과 약탈을 일찍부터 당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창녕 지역의 재지사족(在地士族)과 토성(土姓)들은 전쟁 초기부터 의병을 조직·활동했으며,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은 재지사족을 규합하여 의병운동을 지원했다. 이런 모습은 창녕 지역 의병운동의 한 특징이다. 임진왜란 개전기에 있었던 창녕과 영산전투는 경상우도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인근 지역의 의병들의 지원, 창녕과 영산 지역 의병들의 참여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창녕에서는 성씨(成氏)와 조씨(曺氏), 영산에서는 신씨(辛氏) 가문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의병을 규합하여 곽재우의 의병과 연합해 싸웠다. 지역의 지리에 밝은 의병들은 박진, 박곡 등에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다. 정유재란 시기에는 청야책(淸野策)에 따라 인근 고을 민을 동원하여 화왕산성을 쌓아 대비했는데, 농성전(籠城戰)으로 큰 전투 없이 수성(守城)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시기에 창녕 지역에서의 피난과 포로의 모습은 전쟁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주목된다. 일본군에 적극적으로 부역(附逆)한 영산인 공휘겸(孔撝謙)이 있었다. 포로가 된 이진영(李眞榮)은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 군에 끌려가 일본의 와가야마(和歌山)에서 살았다. 또 영산(靈山)에서 포로가 되어 인신매매를 당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피난의 경우 영산의 이석경(李碩慶)은 영산이 요충지에 위치하므로 난을 면할 수 없는 곳이라고 여겨 거창으로 피난했다가 친구 정구(鄭逑)가 부사로 있던 강릉(江陵)으로 들어가 지내다가 1596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명(明)의 군사가 왕래하여 마을이 소란하자 현풍현 가태산(嘉泰山)에 셋집을 얻어 살았다. 1597년에는 곽재우와 군사 일을 의논하다 아버지의 상을 당한 후 다시 관동(關東)으로 갔다. 1599년 봄에 고향으로 돌아와 냉천정(冷泉亭) 아래로 이주하였다. 한편 창녕으로 피난 온 경우는 양산의 정승우(鄭承雨)가 일본군에 잡혀서 히젠(肥前)으로 팔려갔다가 돌아와 어머니를 모시고 영산현에 와서 살았다.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에 대한 평가와 기억의 재생을 국가 유지에 이용하였다. 창녕에서는 많은 인물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올랐으며, 열녀에 선정되어 정문(旌門)을 받은 여인들이 있었다. 숙종 연간에는 임진왜란 때 활동한 인물을 배향하기 위해서 연암서원(燕巖書院)과 물계서원(勿溪書院)이 건립되었다. 정유재란 시기에 있었던 화왕산성의 수성은 조선후기 경상도의 남인에게는 이념적 구심점이 되었으므로 영조 연간에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이 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창녕 지역의 인사로 명단이 올라 있는 인물들은 화왕산성과 가까운 지역이었기 때문에 실제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활약한 인물들이었다. 한편 창녕 지역의 열녀수는 영산 1건, 창녕 9건으로 영산보다 창녕 지역에서 많았다.
麗․宋 시기의 海上航路의 형성과 활용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1, 2014.10)

麗․宋 시기는 동아시아교역권이 성립되는 시기였으며, 松商의 활동이 활발한 시기였다. 麗․宋 시기의 해상항로는 황해횡단해상항로와 남방해상항로 외에도 제주도경유남방해상항로가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제주도는 여․송의 교류뿐만 아니라 日․宋의 교류에서도 중요한 위치였다. 제주도는 食水의 공급처, 항로의 중간 경유지로서만이 아니라 고려가 제주도를 거쳐서 남송으로 가는 남방해상항로도 기능했다. 특히 私貿易이나 밀무역, 비상시의 해상항로로서 주목되는 항로였다. 麗․宋 시기의 해상항로는 北宋과 南宋 시기의 정치․외교적인 상황에 따라서 해상항로가 바뀌었다. 그렇지만 국가적인 차원의 公貿易은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여 항로가 변화되어 운영되었지만, 상인과 私貿易에서는 필요에 따라서 기존에 사용하던 항로를 계속 사용했다. 麗․宋 시기의 해상항로는 동아시아교역권의 성립과정에서 황해황단해상항로보다는 남방해상항로가 상인들에 의해서 많이 활용되었다. 그것은 宋商이나 고려 상인들이 사무역의 주요 해상항로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제주도경유남방해상항로도 주요한 해상항로로서 기능을 하면서 고려 상인들에 의해서 활용되었다.
조선후기에 해항도시 부산에서의 문화교섭 양상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2016.04.30)

조선후기에 해항도시 부산에 있었던 초량왜관은 조선 내에 존재한 유일한 일본인 거주공간이자, 동북아시아 최대의 외국인 거주공간이었다. 때문에 500명 내외의 일본인이 상시 거주했던 초량왜관은 대표적인 문화 접촉지대였던 해항도시 속의 경계지대였다. 이에 초량왜관에서는 조선과 일본은 문화교류와 접촉이 제한적인 각종의 조처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문화교류와 접촉은 양국인의 접촉 과정에서 나타났는데, 정상적인 경우와 불법적인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일반인의 경우 朝市 참여, 왜관 작업 참여, 密貿易, 欄出, 交姦 등을 통해서 일본인과 접촉하면서 다양한 일본 문화를 접촉하고 수용해 나갔다. 그리고 초량왜관에서의 문화접변과 혼종화는 이국문화의 수용 단계 이후 지역사회를 거쳐서 전국으로 전파되어 나갈 수 있었다. 초량왜관에서 문화교류와 접촉을 통한 문화접변과 혼종화 양상은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는 불법, 탈법, 범법의 행위였지만, 초량왜관과 주변의 공간에서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방법으로 지속되었다. 특히 음식문화와 생활문화는 조선과 일본에 많은 영향과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때문에 초량왜관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각자의 문화를 전달하고 수용하여 문화접변이 진행되었던 동북아시아 최대의 경계지대이자, 문화 혼종화가 진행된 상생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漂人領來謄錄 속의 濟州島 漂流民과 海域
(탐라문화 51, 2016.02.28)

17~18세기 중반에도 제주도는 지속적으로 표류민이 발생한 지역으로 해역의 변화상을 설명해 주는 좋은 사례이다. 조선후기의 자료 漂人領來謄錄에는 일본으로 표류했던 제주도인의 표류사례 30건이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의 표류민은 바람과 해류의 영향으로 추자도와 제주 해역에서 표류당하여 일본의 九州의 肥前州, 筑前州, 對馬島에 주로 표착하였다. 표착 후에 표류민은 長崎나 對馬島를 거쳐서 조선 동래부로 송환되었다가 제주로 돌아왔다. 조선후기가 되면 표류민의 송환은 국가 사이의 절차를 따랐는데, 이것은 자연적 현상에 인위적 체제가 작동하여 마무리되었음을 말해 준다. 제주도 표류민은 표착지에서 일본인과 만나면서 일본문화를 접하기도 했다. 17~18세기 중반에 제주도 표류민의 표류 시기는 해류와 바람의 영향으로 겨울철에 많이 발생하였으며, 제주도민이 표류선에 승선한 이유는 進上을 하러 가거나 진상을 마친 이후에 제주도로 귀환하는 과정이었다. 제주도 표류민의 표류선에는 진상 외에도 무역, 추쇄 등 다양한 이유로 同船한 경우가 많았다. 17~18세기 중반에 표류한 제주도 표류민의 공통적인 특징은 일본 현지에서의 조사과정에서 출신지를 전라도의 군현으로 위장하여 換稱한 점이다. 그것은 일본에 잘못 알려진 정보 때문이었는데, 異文化에 대한 인식이 바로잡히지 않은 모습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 제주도 해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표류민 문제는 일본뿐만 아니라 제주도 인근 국가에 표류한 사례까지 포함하여 검토함으로써 제주도 해역에서의 표류민 문제를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졌던 표류민 송환 문제를 동아시아 차원에서 규정함으로써 해역사 연구를 새롭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도 제주도는 주목되는 지역이다.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지역과 역사 38호, 2016.04.30)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지금까지 행해진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측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현재까지 연구된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 성과를 전쟁사적 측면에서 크게 분류해 보면 전쟁의 명칭, 성격, 원인, 경과, 영향으로 나눌 수 있다.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일본에서는 구조적 측면에서 시대구분, 국가구조와 체제, 군량 운송과 피로인 송환체제 등에 연구가 진전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국난극복사적 측면에서 전쟁의 극복 문제, 의병과 주요 인물의 역할, 전쟁이 국내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한 연구가 많다. 그래서 양국의 연구 성과 가운데는 공통되는 부분도 있지만, 시각을 달리 하는 부분이 아직도 많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전쟁의 원인을 국내적인 시각에서 볼 것인가, 동북아시아 차원에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전쟁의 경과에서는 전쟁의 극복이라는 시각에서 의병의 역할을 중시할 것인가, 군수의 운송이 원활하지 못한 점을 중시할 것인가의 입장이 있다. 전쟁의 영향에서는 국내적 차원에서 볼 것인가, 국외적 시각에서 볼 것인가의 문제가 피로인 문제와 성격에서 남아 있다. 전쟁의 성격에서는 왜란으로 볼 것인가, 전쟁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 나라의 시각을 공유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임진왜란 연구에 있어서의 올바른 방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임진왜란을 동아시아의 시각에서 전쟁을 통해서 문화충돌과 접변이 발생하였으며, 해역을 통해 문화교섭이 진행된 시기였음을 인식해야 한다. 둘째, 임진왜란을 국가적 규모의 왜구인가, 아니면 국가 사이의 전쟁인가에 따라 객관적인 용어가 사용되어야 한다. 셋째, 각국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벗어나 전쟁의 원인, 경과, 영향 등을 객관적으로 연구하여야 하며, 전쟁이 남긴 교훈을 얻으려는 관점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넷째,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전쟁 당사국의 자료를 활용해 비교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의 사료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굴하고 객관화시켜 이용해야 한다.
이지항 표주록 속의 표류민과 해역 세계
(해항도시문화교섭학, 2017.04.30)

이지항의 『표주록』은 1696년(영조 32) 4월 13일 이지항이 강원도 원주에 가기 위해서 부산에서 寧海로 가던 중, 破船되어 일본의 蝦夷地까지 표류했다가 돌아온 약 11개월의 체험을 적은 기록이다. 저자 李志恒은 武官이었지만, 일본에서 지은 詩와 일기로 볼 때 학문도 상당하였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는 표류에서 귀환까지의 과정을 公述 과정을 통해서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으며, 표류 과정에서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지항 일행은 부산을 출항한 지 16일 되던 날 일본의 蝦夷地 서해안에 漂着하였다. 여기서 蝦夷族으로부터 음식을 얻어먹으며 연명하다가 연해를 따라서 내려와 松前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江戶와 大坂을 거쳐 對馬島에 도착하였다가 漂差倭와 함께 부산으로 귀항하였다. 조선시대에 일반적인 일본으로의 표류가 對馬島, 九州, 琉球였던 데 비하면, 이지항이 표류한 해역은 특별한 사례이다. 때문에 『『표주록』』에는 異文化의 체험이 많아서 표류민의 체험과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좋은 예가 된다. 무엇보다도 李志恒 일행이 松前에 있을 때, 그곳의 太守 등과 불교·神·유교에 관해 나눈 이야기와 耶蘇敎 포교에 관하여 筆談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지항은 표착한 일본의 풍속과 문명에 대해서 보고 느낀 바를 우호적인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는데, 일본에 대한 전통적인 華夷觀이 표출되어 있지 않다. 특히 蝦夷에서 蝦夷族과의 물물교환, 筆談과 詩書를 통한 松前人들과의 의사소통 등은 일본 동북쪽 지역과 조선의 교류라는 측면에서도 주목해야 할 사례이다. 조선후기에 동북아시아의 해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표류민 문제는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많이 발생하였는데, 특히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표류 문제를 통해서 지리적 해역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졌던 조선과 일본 사이의 표류민 송환 문제를 동북아시아 차원에서 규정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해역사를 새롭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이지항의 『표주록』은 중요한 표류민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의 『표주록』은 조선인으로서 최초의 蝦夷地 방문자가 남긴 체험적 기록이라는 점, 또 그 일행의 다양한 문화교류 활동을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표인영래등록 속의 경상도 표류민과 해역
(역사와 경계 103호, 2017.06.30)

17~18세기 중반에 경상도 연안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했던 표류민은 동북아시아의 해역을 설명해 주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조선후기의 자료  『漂人領來謄錄』에는 일본으로 표류했던 경상도인의 표류사례 142건이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의 표류민은 바람과 해류의 영향으로 경상도 동해안에서 표류할 경우 일본의 표착지는 對馬 70건, 長門 39건, 筑前 18건, 石見 11건으로 4개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표착 후에 표류민은 長崎나 對馬島를 거쳐서 조선 동래부로 송환되었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의 표류민 송환은 국가 사이의 절차를 따랐는데, 이것은 자연적인 우발적 사건에 인위적인 국가 사이의 체제가 작동하여 마무리되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경상도 표류민은 표착지에서 일본인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문화를 접하기도 했다. 17~18세기 중반에 경상도 표류민의 표류 시기는 해류와 바람의 영향으로 겨울철에 많이 발생하였는데, 경상도민이 표류선에 승선한 이유는 해상에서 어로 활동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경상도 표류민의 표류선에는 어로 활동 외에도 상업과 운송 등 다양한 이유로 同船한 경우도 있었다. 17~18세기 중반에 일본으로 표류한 경상도 표류민의 공통적인 특징은 한 배에 승선한 인원이 10명 내외로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농한기에 생활을 위해서 어로 활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조선 표류민은 일본에 표착한 후 먼저 일본 현지에서 인도적인 구호를 지원받은 후 長崎와 對馬島를 거쳐서 동래로 송환되었다. 조선 표류민의 송환은 대부분 대마도의 年例送使나 漂人領來差倭가 조선에 올 때 함께 왔다. 이러한 일본 사절에 대해서 조선에서는 예물을 준비하여 茶禮, 下船宴, 上船宴에 이르는 여러 차례의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원칙적으로 조선후기에는 표류민의 송환의 비용은 해당국에서 무상으로 부담하였다. 조선후기에 경상도 해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표류민 문제는 앞으로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인근 국가에 표류한 사례까지 검토함으로써 경상도 해역에서 발생했던 표류민 문제를 보다 구체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졌던 표류민의 송환 문제를 동아시아 차원에서 규정함으로써 해역사 연구를 새롭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조선후기에 경상도 연안에서 일본 연안으로 표류했던 경상도 표류민에 대한 연구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남명 조식의 치국론과 의미(남명학 23호, 2018.03.30)
조선중기의 성리학 체계화 과정에서 사상에서는 의리와 실천을 강조하고, 정치에서는 현실의 모순에 대해 타협을 거부하며 적극적인 개혁을 주장한 南冥 曺植은 비판적 지식인이자 전형적인 處士였다. 이에 16세기의 현실 모순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현실정치에 대한 개혁책이 적극적으로 담겨 있는 남명의 4차례의 上疏를 토대로 남명의 정치 현실에 대한 治國論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서 남명의 치국론을 정치의 영역을 크게 지방정치와 중앙정치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남명의 치국론의 중요성은 지방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 남명은 현실 정치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16세기의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자신이 거주하던 지역사회의 안정이 필요하였다. 이에 재지사족이 향촌통제책을 행사할 수 있는 향촌자치론이 남명에게도 필요하였다. 남명의 문인들에 의해서 일어났던 毁家黜鄕은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아울러 재지 지주였던 양반의 입장에서 농경지의 경작을 위한 농민 계층의 안정이 필요하였는데, 이것은 조세제도의 공정성을 유지하고 부정을 방지하여 향민의 안정을 꾀해야 한다는 향민보호론으로 나타났다. 한편 남명은 조선중기의 절대군주제를 인정하고 君臣共治를 통해서 중앙의 정치가 안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남명은 먼저 군주의 수신과 덕치를 이상으로 하는 성학군주론을 주장하였다. 아울러 군주의 정치가 원활하게 집행되기 위해서 수령과 향리의 엄정한 선택과 부정․비리를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작동할 수 있는 행정체계론을 지지하였는데, 특히 인재의 등용을 중시하였다. 결론적으로 남명의 치국론은 지방과 중앙 정치의 영역에 맞게 주장되었다. 먼저 중앙정치에서는 위정자의 올바른 처신과 역할, 위정자의 수신과 솔선수범, 위정자와 신료들과의 소통의 중요성, 제도 시행의 엄정성, 국방의 자위성 확보와 주체적인 외교 문제였다. 지방정치에서는 향촌자치, 목민관의 솔선수범, 백성의 민생 안정, 관료의 부정부패와 비리 척결, 상하의 소통 문제였다. 남명은 시대정신에 따라 만들어진 정치형태를 부정과 편법을 통해 왜곡시키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시행해 나가는 것이 현실 개혁의 방향이라고 보았다.
Globalization of Sea Area of Northeastern Asia in 14-16th Centuries : Focusing on the Japanese Pirates(다문화사회연구, 2018년 4월호, 2018.03.16)
Historically, sea areas in Northeastern Asia were the channel that connected the cultures and commodities in Ming(明)-Joseon(朝鮮)-Japan(日本) where clashes and conflicts existed as well. In the 14-16th centuries, the three states were under a tributary system based on a tribute-return exchange established since the Ming dynasty. However, there was a huge difference in the centralization of the state power between Joseon and Japan, which loosened the tributary system. In this era, Japanese pirates were very active under different forms. Previously, the studies on Japanese pirates mostly focused on the national history. The main subjects of those studies could be used to categorize by periods the piracy itself, the main agents of the pirates and the recognition of Japanese pirates from sea areas. The main problem of those studies is that they reflect the current views on the nation-state-territory, namely the approach of one nation’s history or the national history. The study of Japanese pirates should allow to make approaches on the piracy within the historical context of the 14-16th centuries-the expansion of trades, the distribution of silver, the failure of the Japanese’s closed-sea policy and the expansion of sea areas-in order to comprehend the historical meanings of Japanese pirates. Through the movement of people, goods and information, Japanese pirates of the 14-16th centuries were globalized. In this sense, it is inappropriate to call them Japanese pirates(倭寇), but the sea robber(海賊). Further studies should focus on the social changes by the association of low-class people, traders and the expansion of sea areas caused by pirate’s activities. Furthermore, we need to approach the problem with a multi-national point of view, rather than one national one, to understand it as a development of the contacts and exchanges among different regions rather than under a centralized control. Through the widening of our perspectives, we comprehend now the process of globalization of Japanese pirates and their impact on Northeastern Asia in the 14-16th centuries.
임진왜란 시기 일옹 최희량의 활동과 기억(이순신연구논총 28호, 2017.12.31)
임진왜란 시기에 전라도 흥양현감으로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일옹 최희량(崔希亮)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최희량은 1560년(명종 15)에 태어나 1651년(효종 3)에 죽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정유재란 때 많은 활동을 했다. 최희량의 본관은 수성(隋城), 호는 일옹(逸翁)이다. 그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에는 아버지의 상중(喪中)이어서 전장에 나아가 싸우지 못하였다. 그는 1594년 무과에 급제한 후, 충청수사로 있던 장인 이계정(李繼鄭)을 돕도록 천거되어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흥양현감(興陽縣監)으로 이순신(李舜臣)의 아래에서 12차례 전공을 세웠으며, 적의 군량 800여 석을 탈취했으며, 포로 700여 명을 되돌려 왔다. 이에 이순신의 격찬을 받았지만,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서 지냈다. 병자호란 때는 나이가 많아서 직접 출전하지 못하고, 대신 아들을 보내어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扈從)하게 하였다. 최희량은 전쟁 중에 수군과 육군 지휘부의 갈등 등으로 모함을 받기도 했지만, 임진왜란 종전 이후에 전공을 인정받아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올랐다. 그는 1774년(영조 50)에는 향인들의 청원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00년(정조 24)에는 나주 향인들이 지은 忠逸祠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1871년(고종 8) 시호가 무숙(武肅)으로 추증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일옹집(逸翁集)』이 있는데, 시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보물로 지정된 「破倭報牒」은 임진왜란 시기에 전공에 관한 보고의 내용과 체계, 전투에 대한 전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기 양무공 김태허의 활동과 의미(한국민족문화 67호, 2018.05.31)
임진왜란의 극복은 많은 인물들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임진왜란 후에 선정된 宣武原從功臣 9,060여 명의 명단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했던 그들의 업적이 제대로 알려져 있는 사례는 아직까지 제한적이다. 임진왜란 때 밀양 출신으로 울산을 중심으로 많은 전공을 세운 襄武公 金太虛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시기에 양무공 김태허의 활동은 밀양에서의 창의 이후, 울산 지역 관군의 장으로서 전투 참전과 지휘, 적정의 정탐 활동과 정보 수집과 보고, 군수 지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울산군은 임진왜란 이후 울산부로 승격되는데, 그 중심에는 울산군수 김태허의 활약이 있었다. 임진왜란 중 대부분의 시기에 일본군은 동남해안에 쌓은 倭城에 주둔하여 근거를 마련하고서 인근 지역을 약탈하면서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군도 일본군에 대한 상시적인 대비를 통해서 방어를 해야만 했다. 때문에 울산 지역은 임진왜란 전 시기에 걸쳐서 최전선이었다. 당시 울산에서는 김태허가 울산군수로서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는 관군과 의병을 통괄하면서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양무공 김태허가 임진왜란 시기에 세운 전공은 전쟁 전후에 관직의 제수, 포상과 현창의 과정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것은 전공에 대한 여러 차례의 陞差, 功臣의 선정, 祠宇의 건립, 諡號의 하사로 이어졌다. 이런 조치들을 통해서 양무공 김태허는 전쟁 이후에 지역사회에서도 鄕案에 入錄되었으며, 읍지의 인물조와 충렬조에 기재되면서 공적으로 인정되고 기억되어 나갔다.
정유재란 시기 황석산성 전투의 전개와 의의(이순신연구논총 30, 2018.12)

7년간 이어진 16세기 후반의 동북아시아 최대 전쟁 임진왜란에서는 많은 전투가 있었다. 정유재란 시기에 함양에서 있었던 대표적인 두 차례의 전투가 황석산성전투와 함양 사근역 부근 전투였다. 정유재란 때의 황석산성전투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전투사의 측면의 의미이다. 정유재란 시기에 황석산성전투는 함양 지역이 일본군의 전라도 침공로에 위치한 지리적 요인 때문에 전투가 발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일어났던 황석산성전투는 정유재란 시기에 경상도의 육지전투에서 있었던 실질적인 첫 정식 전투였다. 조선에서는 강화회담기에 준비했던 山城入保의 淸野策에 따라 안의, 거창, 함양의 세 군현의 軍․官․民이 황석산성에 들어가서 대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황석산성이 군사수의 열세 등으로 비록 함락되었지만, 청야책과 守城戰의 전개로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으며,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일정 부분 지연시켰다. 다음으로 정치사상사적 측면의 의미이다. 황석산성전투는 결과로 따지면 패배한 전투였지만, 조선후기 사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였던 전투였다. 임진왜란의 종전 이후 황석산성전투는 지속적으로 임진왜란을 기억하고 전승하는 현장이 되었다. 이것은 조선왕조가 성리학의 국가 이념을 강화하고 백성을 교화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황석산성전투에서 민․관․군이 하나가 되어 끝까지 최선을 다했음을 국가가 공인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황석산성전투는 역사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황석산성전투의 희생자들은 백성에 대한 모범 사례로 인정되어 기려 나가게 되었다. 그런 절차는 황석산성의 순절자에 대한 追贈, 復戶, 祠堂 건립, 諡號 제정, 旌表를 통해서 나타났다. 특히 안의현감 郭䞭은 三綱大節의 실천 모범 사례로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소개되었으며, 함양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열녀 등 정표자가 많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황석산성전투가 임진왜란 전체 전투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다. 황석산성전투는 정유재란 초기에 조선과 명군의 지원이 없이 고립 상태에서 민․관․군이 하나가 되어 지역방어를 수행하여 끝까지 일본군에게 항쟁했던 전투였다. 이런 점에서 황석산성전투는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이 준관군화 되어 활동했던 후기의병의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청도 지역 고성이씨 가문의 임진왜란 극복 양상(역사와 세계 54호, 2018.12)
임진왜란 시기에 청도 지역에 거주했던 固城李氏 가문의 5의사는 다양한 형태로 전쟁을 극복하는데 기여하였다. 청도 지역의 고성이씨는 조선중기의 士禍期 이후에 안동에서 청도로 李育이 이주해 온 후 사족으로서 在地的 기반을 다져나간 가문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초기에 일본군의 침략을 받은 청도에서 고성이씨 가문의 인사들은 초기부터 청도 지역의 전쟁 극복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는데, 이것이 난 후에 청도 지역에서 향촌지배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시기에 청도 지역의 고성이씨 가문은 전쟁의 극복을 위해서 청도 지역과 다른 지역에서 전쟁 극복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먼저 청도 지역에서 密城朴氏 가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의병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에 비교적 빠른 시기에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던 청도의병에 李磬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李濂과 李澈 등이 활동하였다. 이들은 청도의병을 주도한 밀성박씨 가문 등과 합세하여 활동하였는데, 특히 李磬은 돌격장으로 활약하였다. 다음으로 가계가 분명하지 않은 李潛은 전라도 체찰사 鄭澈에 의해 邊士貞 휘하의 부대에 보내져서 副將으로 활약하다 계사년 진주성전투에 참가하여 순절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는 경상우도 고령의 吳澐 집안과 혼인으로 연결되며, 대구의 의병장이었던 蔡夢硯이 그의 비문을 작성하고 있다. 李海는 청도에서 창의하여 활약하다 정유재란 때 權慄의 諭書를 받고 남원성전투에 참가하여 순절하였던 인물인데, 絶命嗣와 義馬塚이 전해 온다. 정유재란 때의 활동과 관련하여서는 청도의 고성이씨 가문의 인사들이 郭再祐의 『火旺山城同苦錄』 등에 이름이 올라 있다. 이처럼 청도 고성이씨 가문의 5의사는 임진왜란 시기에 계속적으로 일본군과 대치하였던 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쟁 극복을 위한 다양한 항쟁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이 때문에 전쟁 후에 청도 지역의 항촌사회를 주도해 나갈 수 있는 대표적인 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 작성된 鄕案에 이름이 등재되었다.
임진왜란기 충순당 이령의 의병 활동과 기억화(역사와경계 110호, 2019.03)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는 육지의 의병 활동, 바다의 이순신 장군의 활약, 명군의 지원과 관군의 정비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제일 주목되는 것은 의병의 활약이었다.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은 조선 전역에서 조직적으로 일어났지만, 경상우도에서 가장 적극적이었다. 이 문제는 성리학의 발달과 연계해서 이해할 수 있다. 15세기 士禍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던 함안의 在地士族은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대표적인 영남의 성리학자 퇴계 李滉과 남명 曺植의 학문이 절충되는 지역으로서 학문적인 기반을 넓혀 나갔으며, 한강 鄭逑가 군수로 부임한 이후 학문적 진전이 일어났던 고장이었다. 충순당 이령 가문은 李好誠 때부터 함안의 지역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 나가면서 재지사족으로서 기반을 내렸다. 특히 이령 가문의 형제들은 외숙부인 안음의 갈천 林薰과 林芸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지역의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도모해 나갔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령도 성리학의 기본적인 가치인 忠과 孝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이에 충순당 이령은 임진왜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주저 없이 의병을 창의하여 100여 명을 모아서 김해부성으로 달려갔다. 그는 김해부사 徐禮元로부터 동문 수성의 임무를 부여받아 활약하였다. 이령은 김해부사 서예원이 도망한 후에 일본군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군사가 김해읍성을 공격해 오자, 피하지 않고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그러나 그의 순절과 죽음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사라질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충순당 이령의 후손들과 지역인사들의 노력으로 임진왜란 시기에 활약했던 이령의 전공이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며,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사실로 기려지게 되었다. 먼저 임진왜란 이후 이령의 후손에게는 復戶의 혜택이 주어졌다. 다음으로 이령의 임진왜란 활동을 인정받기 위해서 후손들과 지역인사들은 上言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여론을 환기하여 旌閭를 받았다. 마지막으로는 후손 李文爀이 3차례 擊錚을 통해서 贈職을 받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300여 년이 지났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이령의 순절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에 정려각 충순당의 건립과 추증 교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조선왕조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지역의 의병장이라도 지역사회의 노력으로 공적을 인정받아서 후대에 기억할 수 있게 한 사례이며, 그러한 절차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방익 표해록 속의 표류민과 해역 세계(역사와 세계 55, 2019.06)

조선후기에 청나라의 복건성 澎湖島에 표류했다가 돌아와서 󰡔漂海錄󰡕을 남긴 李邦翼의 가문은 星州李氏로 제주도에 세거해 온 武人 가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장을 지낸 李光彬이다. 이방익은 1784년(정조 8)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忠壯將·오위장·全州中軍 등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는 충장장으로 있을 때인 1796년 9월 제주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청나라의 福建省 澎湖島에 표착하여 臺灣·廈門·浙江·江南·北京·義州를 거쳐 1797년 윤6월 20일에 한성에 도착하였다. 그는 국문으로 「漂海歌」를 지었으며, 󰡔漂海錄󰡕을 남겼다. 현재 이들 기록과 관련되는 다양한 자료들이 남아 있다. 이방익 일행은 복건성 팽호도에 표착한 이후 청나라에서 問情을 받은 후 인도적인 구호조처를 받으면서 북경으로 이송되었다. 이 과정에서 현지인들과 접촉하면서 청나라의 이국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대화는 이방익이 한자를 알고 있어서 가능했는데, 그는 귀국 후에 심문 과정과 정조의 관심으로 그동안 기록해 두었던 자료를 토대로 표류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이방익이 표류한 해역은 제주에서 臺灣에 이르는 동아시아의 해역이었는데, 그의 일행은 대만을 거쳐 복건성 하문으로 건너가 청나라의 육지에 상륙하였다. 이후 청나라의 대륙을 거쳐 北京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의주를 거쳐 귀국할 수 있었다. 이방익은 귀국 과정에 의주에서 받은 심문에서 표류 과정에 대해서 진술하였으며, 이때 소지품도 검열 당하였다. 당시의 소지 품목은 청나라에서 구호품으로 받은 것이었지만, 자신들의 물품과 교환한 것도 있었다. 이방익 일행의 표류민 송환은 청나라와 조선의 송환체제가 작동하여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이방익이 남긴 「漂海歌」와 󰡔漂海錄󰡕을 통해서 조선에서 동아시아 해역에 속한 대만으로 표류하는 경우 청을 통해서 송환되어 왔으며, 이러한 표류를 통해서 대만과 청의 江南에 대한 문물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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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섭으로 본 임진왜란(선인, 2014.04.30)
임진왜란은 해역 세력 대 육역 세력의 대립이었으며, 해역을 통한 문화교섭이 여러 측면에서 진행된 시기였다. 이 책은 문화교섭의 시각에서 조선시대의 조일 관계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전쟁의 원인․경과․결과․영향 및 전쟁의 극복을 다루는 전쟁사․의병사의 시각, 조선시대 조일 사이의 대외 관계사의 시각에서 주로 연구되었다. 하지만 조선전기에도 조일 사이에는 문화교섭이 지속되었는데, 대장경, 범종, 불사의 조연 요청이 대표적이다. 때문에 임진왜란은 일본의 조선문화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으며, 임진왜란을 문화약탈전쟁이나 도자기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아울러 임진왜란의 배경에는 15세기 후반의 대항해시대의 개막이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은 16세기 최대의 국제전쟁으로 조일 두 나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해양을 건너서 와서 일으킨 전쟁이었다. 전쟁으로 많은 문화충돌도 있었지만, 문화교섭이 촉진되기도 했다. 다만 일본이 조선문화를 약탈하는 과정에서 부작용도 상당히 많았다. 그렇지만 임진왜란을 통해서 서양문화와 동양문화의 교섭, 조선과 일본의 문화교섭이 진행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임진왜란을 통한 문화교섭은 크게 보면 전쟁, 개인, 문물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전쟁을 통한 문화교섭이다. 16세기 후반에 동아시아에서 사회변화가 일어날 시점에, 대항해시대의 개막으로 서양문화가 동양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서양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문화교섭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오랫동안 조일 사이는 문화교섭을 진행해 왔으며, 특히 조선전기에 일본은 조선문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해 왔다. 하지만 조선은 국내사정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시기가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발생한 임진왜란은 일본에게는 문화 약탈의 좋은 기회였다. 문화교섭은 상호적이기 때문에 비록 많은 조선문화가 일본으로 넘어갔지만, 일본문화도 조선으로 전파되어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고추와 두부를 통해서 문화교섭이 조일에 전쟁 이후에까지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으며, 전쟁으로 일본에 전파된 조선문화는 일본 근세사회의 성립에 직접적으로 크게 기여하였다. 다음으로 사람을 통한 문화교섭이다. 개인은 문화교섭의 중요한 주체이다. 전쟁으로 조선에서 일본으로 잡혀간 5~10만 명의 포로들은 곳곳에 조선문화를 전하였으며, 전쟁 이후에 일부 쇄환되어 돌아오기도 했지만 일본에 정착해 생활하였다. 현재까지도 큐슈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조선인 거주촌이 남아 있으며, 임진왜란과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문화재들이 남아 있다. 역으로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화한 항왜는 조선문화에 감동받아 귀화하기도 했지만, 조선의 적극적인 항왜 유치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항왜는 조선에 정착하여 조선인화 하였으며, 일본문화를 조선에 전파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야가인데, 달성군의 우록동에 후손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문물을 통한 문화교섭이다. 문물은 문화의 결정체이므로 문화교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임진왜란 중에 남해안에 쌓은 왜성은 두 나라의 문화가 접촉․혼종하는 공간이었으며,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왜성은 축성기법에서 조선 성곽과 차별되는데, 전쟁 이후에는 조선 성곽에 왜성의 축성법이 이용되기도 했다. 왜성은 전쟁 초기에는 직접적인 전투가 행해진 갈등의 공간이었지만, 일본군의 장기주둔으로 두 나라의 민들이 접촉하는 문화교섭의 현장이었다. 반면에 임진왜란의 전쟁 흐름을 바꾸어 놓은 조총은 일본이 서양문화를 수용하여 전쟁에서 효과를 본 사례이다. 조총의 등장은 전술적으로 기병전이 보병전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조선은 항왜를 통해 조총의 제조 기법을 수용했다. 조총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제도의 근간을 바뀌게 할 정도로 큰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부산의 재발견(선인, 2014.05.30)
부산의 재발견이라는 책자 가운데 한류의 출발지, 부산이라는 부분이다. 조선시대에 통신사의 파견과 귀환의 현장이 부산이었다. 부산에는 영가대 등 통신사 관련 유적지가 남아 있으며, 통신사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와 재배에 성공한 곳이 절영도였다. 이런 차원에서 조선시대에 일본과의 관계에서 부산의 중요성을 살펴보았다.
The Formation and Utilization of Maritime Routes during the Koryo and Song Dynasties(선인, 2015.05.31)
The Maritime Silk and Road Seaport Cities라는 책에서 고려와 송나라 시기의 헤상항로와 활용에 대해서 살펴보았음.
문무를 갖춘 양반의 나라(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5.10.15)
조선왕조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큰 전쟁을 거치고도 유지되어던 요인을 양반사회의 작동에서 찾고자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에서 조선의 사대부 시리즈로 출간하였음.
수야곡에 흐르는 충절의 마음(2015.12.31)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발간한 수야곡에 흐르는 충절의 마음에 임진왜란 시기 청도 밀성박씨 14의사의 의병활동이라는 논문을 게재함.
연해방어의 긴요한 마을, 기장(2016.11.01)
2016년 정관박물관 특별기획전 연안방어의 긴요한 고을, 기장이라는 도록에 사료로 본 기장 지역의 관방유적을 게재함.
대구지역임진란사(2017.06.10)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가 펴낸 대구지역 임진란사에 임진왜란 시기 대구권역의 의병운동과 변화를 게재함.
일기를 통해 본 양반들의 일상세계(새물결, 2017.12.27)
한국국학진흥원에서 펴낸, 일기를 통해 본 양반들의 일상세계-17세기 매원일기를 중심으로-에, 광산김씨 예안파의 병자호란 대응 양상 부분을 게재함.
단둥, 단절과 이음의 해항도시(선인, 2018.01.10)
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연구소에서 해항도시문화교섭학연구총서 15로 간행한 단둥, 단절과 이음의 해항도시에 전근대 국경도시 의주 지역의 교통로 변화와 의미를 게재함.
조선시대 해항도시 부산의 모습-군항과 해항-(선인, 2018.05.31)
조선시대의 해항도시 부산의 모습을 군항과 해항으로 나누고, 조선전기, 임진왜란기, 조선후기 세 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군항과 해항의 모습은 부산이 해안 지역이라는 특성에서 비롯되었지만, 부산이 조선시대에 조선의 유일한 무역항이자 교류처로서 국제항구로서 기능하게 하였다. 먼저 조선 전기에 부산이 우리나라의 관문으로서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대일 회유책으로 마련된 왜관의 설치와 아울러 왜구에 대비하는 국방도시로서의 성격을 띠면서였다. 오늘날의 부산이 근대 항구도시로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은 조선 전기에 무역과 국방의 전초기지라는 요충지로서의 성격을 가지면서부터였다. 다음으로 임진왜란 시기에 부산은 해안에 위치한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일본군의 침략을 처음으로 당한 지역이며, 일본군이 지속적으로 주둔했던 공간이었다. 그렇지만 임진왜란 시기에도 부산의 해항으로서의 모습은 임시왜관, 강회회담 등을 통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일본과 명나라의 강화사절은 부산에서 출발하였다. 마지막으로 조선 후기에도 부산 지역은 대일 회유책으로 마련된 왜관의 설치와 아울러 왜구에 대비하는 국방도시로서의 성격을 계속 유지하였다. 오늘날의 부산이 근대 항구도시로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은 조선 후기에 외교와 국방의 전초기지라는 요충지로서의 성격을 가지면서부터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부산은 군항과 해항의 이중적인 모습을 갖추 해항도시였다. 이에 부산의 모습은 조선시대에 군사도시이자 교류도시로서 위치 짓게 했으며, 나라의 관문이 되게 했다. 이후 근대로 접어들면서 부산이 본격적인 국제항으로 변화하게 되는 원천은 조선시대의 해항도시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조선시대 부산의 모습을 찾아내는 작업은 해양수도 부산의 해양 정체성을 밝히는 길이기도 하다.
동아시아해역의 해항도시와 문화교섭 1~2(선인, 2018.05.31)
해항도시문화교섭학연구총서 18~19,동아시아해역의 해항도시와 문화교섭 1~2에 조선 후기 동아시아 해역의 표류민 송환체제를 게재함.
경북지역 임진란사 1~3권(2018.06.25)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에서 간행한 경북지역 임진란사 1~3권(2018.06.25)에 임진란기 영천읍성 수복과 이후의 전투 상황, 임진란 시기 경주성 복성전투와 항쟁 활동, 임진란기 한강학파 임진란 지조자의 항왜활동에 대한 연구, 임진란기 청도지역 고성이씨 고문헌에 관한 연구를 게재함.
21세기와 남명 조식(역락, 2018.12.21)
남명학연구원에서 간행한 21세기와 남명 조식에 남명 조식의 치국론과 의미-상소문을 중심으로-를 게재함.
국난기 성주의 대응과 극복(2018.11.08)
성주문화원에서 간행한 국난기 성주의 대응과 극복에 왜란 부분을 집필하여 게재함.
죽유 오운(예문서원, 2018.12.27)
남명학연구원에서 간행한 죽유 오운에 임진왜란 시기 죽유 오운의 의병 활동과 의미를 게재함.
조선시대 표해록 속의 표류민과 해역(선인, 2018.08.25)
전근대시기에 동북아시아 海域에서 해역을 이용한 네트워크는 국가 차원과 민간 차원에서 작동되고 있었다. 전근대시기에 동북아시아의 해역은 다층적면서도 지리적인 성격이었지만, 문제는 자연발생적인 漂流도 官의 朝貢 통치에 적용되어 해역으로서 영향력이 유지되었다. 이 책에서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표류했던 표류민의 사례, 조선에서 명으로 표류했던 사례, 나머지 국가로의 표류 사례를 통해서 지리적인 해역을 확인하고, 민간 해역 세계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조선시대에 동북아시아 각국에 漂着했던 조선 표류민이 남긴 표해록의  사례연구를 통해서 동북아시아해역에서의 표류 범위를 구체화 할 수 있다. 표류민의 표착지는 민간 표류해역이자 교류지가 되었다. 아울러 조선전기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졌던 표류민 송환 문제가 일본에서 근세국가 성립 이후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지만, 명이나 청과의 관계는 조공체제의 작동 속에 조선전기부터 확립되어 있었다. 때문에 명과 청으로 표류한 조선인의 송환 과정은 육로를 통하여 송환되었다. 표류민의 송환체제는 전근대 시기 국가 사의의 외교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있었던 여러 표류 사례는 전근대시대의 동북아시아해역을 직접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의와 충효로 이어온, 상주 검간 조정 종가(경북대출판부, 2018.11.12)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에서 기획하여 출간하는 경북의 종가문화 시리즈에 상주 검간 조정 종가를 경북의 종가문화 49로 간행함.
정유재란사(범우사, 2018.11.21)(재)임진정유 동북아평화재단에서 기획한 정유재란사에 정유재란 초기 경상도 지역의 전황과 주요 전투를 게재함.


기타내용보기
해양실크로드와 해항도시(2014.09.22)
경상북도,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중국 광저우 중산대학교가 주관한 해양실크로드와 해항도시라는 주제로 중산대학교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서 여송시기의 해상항로와 활용이라는 주제로 발표함.
평화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전쟁(2014.10.14)
2014년 쉬즈메디병원과 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 주관의 함께하는 역사교실에서, 평화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임진왜란으로 문화교섭적인 측면에서 강의함.
한국사 과학 探(2015.01.15)
YTN SCIENCE에서 한국역사의 놀라운 재조명을 위해 기획한 한국사 과학 探이란 프로그램의 주제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흔적, 왜성에 출연하여 왜성의 문화교섭 공간으로서의 의미 등에 대해 설명함.
조선에 쌓은 왜성, 기장죽성리왜성(2015.04.25)
경북대학교 인문사회연구원과 기장군이 주관하는 인문도시사업 가운데 타박타박 인문학 코너에 조선에 쌓은
왜성이라는 주제로 투고하여, 기장왜성을 통한 문화교섭 등에 대해서 기장신문에 게재함.
서평, 이종찬 저, 난학의 세계사(2015.04.15)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2호에 난학의 세계사에 대한 서평을 게재함.
해양문화콘텐츠 : 원류, 인간, 교류(2015.11.26)
2015 동아시아 해항도시 국제학술회의에서 17~18세기 제주도 표류민을 통해 본 해역-표인영래등록을
중심으로-를 발표함.
조엄 조내기 고구마 전래기념사업 학술용역 최종보고서(2015.10.28)
부산대 한국민족연구소에서 주관한 조엄 조내기 고구마 전래 학술용역 최종보고회에서 자문함.
서평, 최부 저, 표해록(2015.10.31)
최부가 지은 표해록에 대한 서평을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3호에 게재함.
The 4th International Conference of the World Committee of Maritime Culture(2014.04.25-26)
The 4th International Conference of the World Committee of Maritime Culture(WCMCI)에서 Changes in the Busan Garrison Castle and Cultural Hybridity in the Choseon Dynasty를 발표함.
통영시립박물관 2016년 1학기 박물관대학(2016.06.16)
통영시립박물관 주최 박물관대학에서 임진왜란에서의 해양과 문화교섭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의하고, 국내의 대응력으로서 의병활동에 대해서 설명함.
7th IMEHA International Congress(2016.06.27-07.01)
제7회 IMEHA에 참석하여 The Form and the Meaning of Cultural Exchange of Sea Port Cities of ‘the Korea-Japan Strait’ in the 16~17th Centuries를 발표함.
절이도 해전과 조명연합수군 역할 평가 토론회(2016.08.19)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주최한 절이도(거금도)해전과 조명연합수군 역할 평가 토론회에서 토론의 사회를 봄.
해양 역사문화유산사업 자문회의(2016.09.07)
국립해양박물관에서 개최한 해양역사 문화유산 조사 관련 자문회의에 참석하여 자문함.
2016 동아시아 해항도시 학술회의(2016.11.24-25)
인하대학교 개교6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해항도시 축적된 과거와 미래의 발굴, 학술회의에서 신의주 원산화교와 배화폭동에 대해 토론함.
2016년 정관박물관 초청강연회(2016.11.30)
정관박물관에서 특별기획전 <연안방어의 긴요한 고을, 기장>을 기념하여 개최한 초청강연회에서 문헌사료로 본 기장의 관방체제에 대해서 강연함.
2016 Trans-Pacific International Conference(2016.12.09)
부경대학교 미래관에서 열린 2016 환태평양 국제학술대회에서 Chen Shangsheng(중국 산동대학교)의 On Piracy and International Anti-piracy Cooperation Mechanisms of Northeast Asia in late Fourteenth Century(Chen Shangsheng)에 대해 토론함.
다대진성과 만나다(2017.03.06)
부산시 사하구청에서 다대진성의 역사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 사하구청 직원을 대상으로 강연함.
이충무공전서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극복 양상(2017.04.26)
해군 진해기지사령부에서 해군 장병에게 이충무공전서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역할에 대해서 강연함.
제7회 세계해양문화연구소협의회(WCMCI) 학술대회(2017.05.19-20)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제7회 WCMCI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Glocalization of Sea Area of Northeastern Asia in 14-16th Centuries : Focusing on the Japanese Pirates에 대해 발표함.
다대진성과 만나다 포럼(2017.05.26)
부산시 사하구청에서 주관한 임진왜란 첫 승지, 다대진성과 만나다 포럼에서 임진왜란 시기의 다대진성전투에
대해서 발표함.
다대진성 기획시리즈(2017.02.24~07.20)
부산시 사하구청의 구보, 내고장 사하에 다대진성 기획시리즈(다대진성의 발자취, 임진왜란 시기의 다대진성전투, 다대진성을 지킨 사람들, 다대진성의 운영, 다대진성의 구조와 건물, 다대진성의 가치와 복원)을 2017년 2월부터 7월까지 6회에 걸쳐서 연재함.
2017년 명청사학회 하계 연구토론회(2017.07)
부경대학교에서 열린 명청사학회와 부경대 해양인문학연구소가 주관한 대항해시대 동아시아 해역세계의 변화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근세 동아시아 해상에서 전개된 표류연구의 동향과 과제(김경옥)에 대하여 토론함.
2017년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2017.10.10)
신라대학교 도서관이 주관한 2017년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자유학기제 연계형 프로그램, 바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징검다리라는 주제의 프로그램에서, 바다의 영웅과 민중의 이야기-임진왜란-에 대해서 강의함.
부산경남사학회 2017년도 동계 학술발표회(2017.12.08)
한국해양대학교에서 열린 부산경남사학회 2017년도 동계 학술발표회에서 15세기 말 남해안 지역 두무악의 발생과 사회경제적 배경에 대해서 토론함.
영국함선 방문역사 고증 및 상징화사업 기본계획수립 용역 중간보고회(2018.01.31)
부산 남구청이 추진하여 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연구소가 수행한 영국함선 방문역사 고증 및 상징화사업 기본계획수립 중간보고회에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함.
제8회 WCMCI 학술대회 발표(2018.03.30-31)
제8회 WCMCI 학술대회에서 A Maritime Conflict between Joseon and Japan in the 16th Century에 대해서 발표함.
2018 제13기 인제대학교 박물관대학(2018.04.19)
2018 제13기 인제대학교 박물관대학, 주제 세계문화유산 탐구(6); 일본의 세계유산-인문학으로 바라본 일본-한일교류의 역사(2)에서 일본 음식문화의 조선 유입 창구, 초량왜관에 대해서 강연함.
음식 인문학-초량왜관을 중심으로-(2018.06.22)
2018년 전국산업체영양사 워크숍(부산)에서 음식 인문학-초량왜관을 중심으로-를 강연함.
한중 군사관계사 학술세미나(2018.08.09)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주관한 국제정세와 전쟁으로 본 조선시대 한중군사관계사라는 국제학술세미나에서 해역사에서 본 동아시아 임진전쟁을 발표함.
창립 1주년 기념 학술대회(2019.04.20)(사)부산대첩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한 창립 1주년 학술대회에서 부산포해전의 승리요인과 위상(임원빈)에 대해 토론함.
2019년도 제47회 한국고전연구 심포지엄(2019.05.31)진단학회에서 주관한 한국고전연구 심포지엄-징비록의 종합적 검토- 심포지엄에서 징비록의 정본 작업과 번역(신태영)에 대해 토론함.
제21회 이순신학술세미나(2019.04.23)충무공 이순신 탄신 474주년 이순신세미나, 임진왜란과 이순신의 전략 전술 세미나에서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수군정책과 이순신의 수군운용(제장명)에 대해 토론함. 
마한문화 아카데미(2019.05.23)2019년 국립나주박물관 봄 강좌, 마한문화 아카데미에서 김천일과 곽재우에 대해 강연함.
2019년도 시민문화교양강좌(2019.06.07)(사)퇴계학부산연구원, 시민문화시민강좌에서 임진왜란 시기 부산지역의 기억과 현대적 계승에 대해서 강연함.
1기 울산愛 인문학 강좌(2018.07.24, 31, 08.07)울산도서관에서 주관한 인문학 강좌(임진왜란 시기의 울산, 임진왜란 강화회담 시기의 울산, 정유재란 시기의 울산)에서 강연함.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2019.05.25~07.07)KBS 라디오 한민족방송,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매주 토, 일요일 방송)에 출연해 제778편(연합함대의 승리 당항포해전)부터 798편까지 임진왜란 전반에 대해서 설명함.
부산의 소리, 충렬사 제향의 소리(2019.06.12)KBS부산국 제작, 충렬사 제향의 소리에 출연해 임진왜란과 동래성전투에 대해 설명함.
충렬사 안락서원 교육회관 특강(2018.02.05)안락서원 교육문화회관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의미와 영향에 대해서 강연함.
제6회 합천박물관 학술대회(2019.06.13)
합천박물관 대강당에서 합천군과 창원대 박물관이 주최한 주제(이순신 백의종군로와 권율 도원수부)의 학술대회에서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 백의종군 전후의 합천 상황에 대해 발표함.
2019년 제10회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2019.07.04~07.07)
제주대에서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제주대학교 등이 주최한 주제(태평양시대 제주의 해양경제와 해양생태문화)의 학술대회에서 표인영래등록에 기록된 표류민과 해역을 발표함.
2019 경북선비아카데미 2차포럼(2019.08.20)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개최한 경북선비아카데미에서 국난시기 방호 조준도의 삶과 정신에 대해서 발표함
2019 부산학 아카데미(하반기)(2019.08.24)
부산광역시립중앙도서관에서 개최한 부산포대첩 이야기에서 임란시기 부산포대첩의 위상이라는 주제로 강연함
해양도시 부산의 문화교류 학술대회(2019.08.29)
부산광역시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바다를 통한 문화교류-부산을 중심으로-에 대해서 기조강연함
임란영천성수복대첩 기념학술대회(2019.08.29)
임란영천성수복대첩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임진왜란 시기 영천읍성 복성전투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발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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