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문
| 논문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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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시기 경상도의 산성 축조와 전투 (지역과 역사 33, 2013. 10)
| 임진왜란 시기에 경상도의 낙동강 유역에는 山城이 집중적으로 축조되거나 보수되었다. 임진왜란 때 주요 산성 전투는 경상도 지역에서 이루어졌는데, 조선군에 승전과 패전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시기에 축조된 산성은 전쟁을 극복하는 데 전술과 전략 면에서 많은 기여를 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에 축조된 산성은 전술적으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주력 화기였던 鳥銃을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으로 널리 채택되었다. 아울러 산성을 활용한 방위법은 우리나라 전통의 방어 전략이 실현 가능성이 있으며, 또 우수함을 확인받은 대표적인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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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해항도시 부산의 절영도진 설치와 운영 (역사와 경계 90, 2014.03)
| 조선시대에 東萊府에 속한 가장 큰 섬이었던 절영도가 개항기에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에 釜山은 유일한 海港都市였지만, 개항을 전후하여 제국주의 세력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교류가 나타났다. 조선시대까지 絶影島에는 牧馬場, 神祠, 漁場, 假倭館이 있었다. 특히 절영도는 設鎭 이전에 국가의 주요 목마장으로 사용됐지만, 조선후기에 외국 선박이 출현하면서 부산항의 咽喉라는 지리적인 요인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시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개항기에 부산에는 일본인의 거주가 증가하였으며, 일본은 기존의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전관거류지를 설정하였다. 일본은 절영도에 불법적으로 病幕을 설치하였으며, 貯炭所를 설치하여 사용했다. 청나라와 영국도 부산에 영사관을 설치하였으며, 러시아도 절영도에 저탄소 설치를 청원하였다. 이러한 외세에 대비하고 개항장을 지키기 위한 국방상의 필요 때문에 1881년 절영도 中里에 水軍僉使의 鎭을 설치하면서 부산의 包伊, 開雲, 西平 3개 鎭을 혁파하였다. 절영도진은 設鎭 후 獨鎭으로 기능하였으며, 1895년 군제개혁으로 폐지되었다. 절영도진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으므로 운영에 반영되었다. 절영도진의 첨사는 15년 동안 13명이 재임했는데, 첨사직은 영전해 가는 중요 자리였다. 절영도진의 첨사는 좌수사의 관할 아래 있었지만, 감리서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절영도진에 소속된 군사는 440명이었으며, 전선에 속한 元防軍은 3,618명이었다. 절영도진의 戰船은 2척이었는데, 각각 兵船 1척과 伺候船 2척이 배속되었다. 절영도진의 운영 수입을 錢으로 환산하면 전체 11,326냥이었지만, 上納分을 제외하면 집행 가능한 실제 수입은 7,522냥이었다. 절영도진의 지출은 廩況 3,852냥, 砲米 367냥 등이었다. 개항으로 부산이 해항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절영도진은 외세 방어를 위해서 설치되었다. 이에 절영도는 기존의 牧馬場에서 군사 防禦鎭으로 변하여 기능을 하였지만, 廢鎭 이후에는 외세의 租借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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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전서의 편찬 배경과 내용 (이순신논총 22, 2013.12)
| 이 글은『李忠武公全書』의 편찬 배경과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기 위해 작성된 글이다.『이충무공전서』는 조선시대에 正祖의 명으로 1795년에 14권 8책으로 간행되었다. 正祖는 이 전서의 서론에 해당하는 綸音과 神道碑名을 직접 지었으며, 발간 비용을 지원하였다. 정조가『이충무공전서』의 간행을 지시한 1792년은 天主敎 문제로 사상 논쟁이 일어났던 혼란한 시대 상황이었다. 정조는 사상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老論의 정신적 지주인 宋時烈을 文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한편으로 이순신을 武의 상징으로 내세워 노론 중심의 정치적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다. 아울러 이순신을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극복의 민족적 영웅이라는 차원보다는 군주에 대한 의리를 다한 忠臣의 상징으로 내세워 왕조의 체제를 안정․유지시키는 방편으로 삼고자 했다. 『이충무공전서』는 총 1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에는 綸音, 碑銘, 卷首가 편차되어 있다. 주목되는 점은 보통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곳에 정조가 1792년과 1793년에 내린 세 편의 綸音이 있다는 점이다. 碑銘은 1794년에 세운 신도비의 비명으로 正祖가 직접 지은 것이다. 卷首에는 敎諭, 賜祭文, 圖說, 世譜, 年表가 있다. 권1~4는 詩, 雜著, 狀啓이다. 권5~8은 亂中日記인데, 이 전서 가운데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권9~14는 附錄으로 내용은 紀實인데, 중국과 우리나라 사적에서 저자 관계 기록을 뽑아 모은 것이다. 맨 끝에 문집의 간행에 관한 尹行恁의 跋文이 별도의 항목은 아니지만 첨부되어 있다. 이 또한 다른 문집들과는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이충무공전서』의 의미는 왕명을 받고 국가적인 사업으로 완성한 만큼 조선시대 출판문화에 있어서 하나의 표본이 되는 典籍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순신 개인의 傳記 자료로서 충분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사 연구에서도 빠질 수 없는 귀중한 1차적 문헌이다. 그리고 龜船과 같은 제도의 원형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소중한 전거가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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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시기 창녕 지역의 대응과 후대의 기억 (한국사상사학 46, 2014.04)
| 임진왜란 시기에 창녕 지역은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진격로와 운송로였으므로 침입과 약탈을 일찍부터 당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창녕 지역의 재지사족(在地士族)과 토성(土姓)들은 전쟁 초기부터 의병을 조직·활동했으며,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은 재지사족을 규합하여 의병운동을 지원했다. 이런 모습은 창녕 지역 의병운동의 한 특징이다. 임진왜란 개전기에 있었던 창녕과 영산전투는 경상우도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인근 지역의 의병들의 지원, 창녕과 영산 지역 의병들의 참여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창녕에서는 성씨(成氏)와 조씨(曺氏), 영산에서는 신씨(辛氏) 가문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의병을 규합하여 곽재우의 의병과 연합해 싸웠다. 지역의 지리에 밝은 의병들은 박진, 박곡 등에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다. 정유재란 시기에는 청야책(淸野策)에 따라 인근 고을 민을 동원하여 화왕산성을 쌓아 대비했는데, 농성전(籠城戰)으로 큰 전투 없이 수성(守城)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시기에 창녕 지역에서의 피난과 포로의 모습은 전쟁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주목된다. 일본군에 적극적으로 부역(附逆)한 영산인 공휘겸(孔撝謙)이 있었다. 포로가 된 이진영(李眞榮)은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 군에 끌려가 일본의 와가야마(和歌山)에서 살았다. 또 영산(靈山)에서 포로가 되어 인신매매를 당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피난의 경우 영산의 이석경(李碩慶)은 영산이 요충지에 위치하므로 난을 면할 수 없는 곳이라고 여겨 거창으로 피난했다가 친구 정구(鄭逑)가 부사로 있던 강릉(江陵)으로 들어가 지내다가 1596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명(明)의 군사가 왕래하여 마을이 소란하자 현풍현 가태산(嘉泰山)에 셋집을 얻어 살았다. 1597년에는 곽재우와 군사 일을 의논하다 아버지의 상을 당한 후 다시 관동(關東)으로 갔다. 1599년 봄에 고향으로 돌아와 냉천정(冷泉亭) 아래로 이주하였다. 한편 창녕으로 피난 온 경우는 양산의 정승우(鄭承雨)가 일본군에 잡혀서 히젠(肥前)으로 팔려갔다가 돌아와 어머니를 모시고 영산현에 와서 살았다.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에 대한 평가와 기억의 재생을 국가 유지에 이용하였다. 창녕에서는 많은 인물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올랐으며, 열녀에 선정되어 정문(旌門)을 받은 여인들이 있었다. 숙종 연간에는 임진왜란 때 활동한 인물을 배향하기 위해서 연암서원(燕巖書院)과 물계서원(勿溪書院)이 건립되었다. 정유재란 시기에 있었던 화왕산성의 수성은 조선후기 경상도의 남인에게는 이념적 구심점이 되었으므로 영조 연간에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이 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창녕 지역의 인사로 명단이 올라 있는 인물들은 화왕산성과 가까운 지역이었기 때문에 실제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활약한 인물들이었다. 한편 창녕 지역의 열녀수는 영산 1건, 창녕 9건으로 영산보다 창녕 지역에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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麗․宋 시기의 海上航路의 형성과 활용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1, 2014.10)
| 麗․宋 시기는 동아시아교역권이 성립되는 시기였으며, 松商의 활동이 활발한 시기였다. 麗․宋 시기의 해상항로는 황해횡단해상항로와 남방해상항로 외에도 제주도경유남방해상항로가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제주도는 여․송의 교류뿐만 아니라 日․宋의 교류에서도 중요한 위치였다. 제주도는 食水의 공급처, 항로의 중간 경유지로서만이 아니라 고려가 제주도를 거쳐서 남송으로 가는 남방해상항로도 기능했다. 특히 私貿易이나 밀무역, 비상시의 해상항로로서 주목되는 항로였다. 麗․宋 시기의 해상항로는 北宋과 南宋 시기의 정치․외교적인 상황에 따라서 해상항로가 바뀌었다. 그렇지만 국가적인 차원의 公貿易은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여 항로가 변화되어 운영되었지만, 상인과 私貿易에서는 필요에 따라서 기존에 사용하던 항로를 계속 사용했다. 麗․宋 시기의 해상항로는 동아시아교역권의 성립과정에서 황해황단해상항로보다는 남방해상항로가 상인들에 의해서 많이 활용되었다. 그것은 宋商이나 고려 상인들이 사무역의 주요 해상항로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제주도경유남방해상항로도 주요한 해상항로로서 기능을 하면서 고려 상인들에 의해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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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해항도시 부산에서의 문화교섭 양상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2016.04.30)
| 조선후기에 해항도시 부산에 있었던 초량왜관은 조선 내에 존재한 유일한 일본인 거주공간이자, 동북아시아 최대의 외국인 거주공간이었다. 때문에 500명 내외의 일본인이 상시 거주했던 초량왜관은 대표적인 문화 접촉지대였던 해항도시 속의 경계지대였다. 이에 초량왜관에서는 조선과 일본은 문화교류와 접촉이 제한적인 각종의 조처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문화교류와 접촉은 양국인의 접촉 과정에서 나타났는데, 정상적인 경우와 불법적인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일반인의 경우 朝市 참여, 왜관 작업 참여, 密貿易, 欄出, 交姦 등을 통해서 일본인과 접촉하면서 다양한 일본 문화를 접촉하고 수용해 나갔다. 그리고 초량왜관에서의 문화접변과 혼종화는 이국문화의 수용 단계 이후 지역사회를 거쳐서 전국으로 전파되어 나갈 수 있었다. 초량왜관에서 문화교류와 접촉을 통한 문화접변과 혼종화 양상은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는 불법, 탈법, 범법의 행위였지만, 초량왜관과 주변의 공간에서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방법으로 지속되었다. 특히 음식문화와 생활문화는 조선과 일본에 많은 영향과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때문에 초량왜관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각자의 문화를 전달하고 수용하여 문화접변이 진행되었던 동북아시아 최대의 경계지대이자, 문화 혼종화가 진행된 상생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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漂人領來謄錄 속의 濟州島 漂流民과 海域 (탐라문화 51, 2016.02.28)
| 17~18세기 중반에도 제주도는 지속적으로 표류민이 발생한 지역으로 해역의 변화상을 설명해 주는 좋은 사례이다. 조선후기의 자료 漂人領來謄錄에는 일본으로 표류했던 제주도인의 표류사례 30건이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의 표류민은 바람과 해류의 영향으로 추자도와 제주 해역에서 표류당하여 일본의 九州의 肥前州, 筑前州, 對馬島에 주로 표착하였다. 표착 후에 표류민은 長崎나 對馬島를 거쳐서 조선 동래부로 송환되었다가 제주로 돌아왔다. 조선후기가 되면 표류민의 송환은 국가 사이의 절차를 따랐는데, 이것은 자연적 현상에 인위적 체제가 작동하여 마무리되었음을 말해 준다. 제주도 표류민은 표착지에서 일본인과 만나면서 일본문화를 접하기도 했다. 17~18세기 중반에 제주도 표류민의 표류 시기는 해류와 바람의 영향으로 겨울철에 많이 발생하였으며, 제주도민이 표류선에 승선한 이유는 進上을 하러 가거나 진상을 마친 이후에 제주도로 귀환하는 과정이었다. 제주도 표류민의 표류선에는 진상 외에도 무역, 추쇄 등 다양한 이유로 同船한 경우가 많았다. 17~18세기 중반에 표류한 제주도 표류민의 공통적인 특징은 일본 현지에서의 조사과정에서 출신지를 전라도의 군현으로 위장하여 換稱한 점이다. 그것은 일본에 잘못 알려진 정보 때문이었는데, 異文化에 대한 인식이 바로잡히지 않은 모습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 제주도 해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표류민 문제는 일본뿐만 아니라 제주도 인근 국가에 표류한 사례까지 포함하여 검토함으로써 제주도 해역에서의 표류민 문제를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졌던 표류민 송환 문제를 동아시아 차원에서 규정함으로써 해역사 연구를 새롭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도 제주도는 주목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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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지역과 역사 38호, 2016.04.30)
|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지금까지 행해진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측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현재까지 연구된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 성과를 전쟁사적 측면에서 크게 분류해 보면 전쟁의 명칭, 성격, 원인, 경과, 영향으로 나눌 수 있다.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일본에서는 구조적 측면에서 시대구분, 국가구조와 체제, 군량 운송과 피로인 송환체제 등에 연구가 진전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국난극복사적 측면에서 전쟁의 극복 문제, 의병과 주요 인물의 역할, 전쟁이 국내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한 연구가 많다. 그래서 양국의 연구 성과 가운데는 공통되는 부분도 있지만, 시각을 달리 하는 부분이 아직도 많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전쟁의 원인을 국내적인 시각에서 볼 것인가, 동북아시아 차원에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전쟁의 경과에서는 전쟁의 극복이라는 시각에서 의병의 역할을 중시할 것인가, 군수의 운송이 원활하지 못한 점을 중시할 것인가의 입장이 있다. 전쟁의 영향에서는 국내적 차원에서 볼 것인가, 국외적 시각에서 볼 것인가의 문제가 피로인 문제와 성격에서 남아 있다. 전쟁의 성격에서는 왜란으로 볼 것인가, 전쟁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 나라의 시각을 공유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임진왜란 연구에 있어서의 올바른 방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임진왜란을 동아시아의 시각에서 전쟁을 통해서 문화충돌과 접변이 발생하였으며, 해역을 통해 문화교섭이 진행된 시기였음을 인식해야 한다. 둘째, 임진왜란을 국가적 규모의 왜구인가, 아니면 국가 사이의 전쟁인가에 따라 객관적인 용어가 사용되어야 한다. 셋째, 각국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벗어나 전쟁의 원인, 경과, 영향 등을 객관적으로 연구하여야 하며, 전쟁이 남긴 교훈을 얻으려는 관점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넷째,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전쟁 당사국의 자료를 활용해 비교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의 사료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굴하고 객관화시켜 이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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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항 표주록 속의 표류민과 해역 세계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6, 2017.04.30)
| 이지항의 『표주록』은 1696년(영조 32) 4월 13일 이지항이 강원도 원주에 가기 위해서 부산에서 寧海로 가던 중, 破船되어 일본의 蝦夷地까지 표류했다가 돌아온 약 11개월의 체험을 적은 기록이다. 저자 李志恒은 武官이었지만, 일본에서 지은 詩와 일기로 볼 때 학문도 상당하였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는 표류에서 귀환까지의 과정을 公述 과정을 통해서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으며, 표류 과정에서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지항 일행은 부산을 출항한 지 16일 되던 날 일본의 蝦夷地 서해안에 漂着하였다. 여기서 蝦夷族으로부터 음식을 얻어먹으며 연명하다가 연해를 따라서 내려와 松前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江戶와 大坂을 거쳐 對馬島에 도착하였다가 漂差倭와 함께 부산으로 귀항하였다. 조선시대에 일반적인 일본으로의 표류가 對馬島, 九州, 琉球였던 데 비하면, 이지항이 표류한 해역은 특별한 사례이다. 때문에 『『표주록』』에는 異文化의 체험이 많아서 표류민의 체험과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좋은 예가 된다. 무엇보다도 李志恒 일행이 松前에 있을 때, 그곳의 太守 등과 불교·神·유교에 관해 나눈 이야기와 耶蘇敎 포교에 관하여 筆談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지항은 표착한 일본의 풍속과 문명에 대해서 보고 느낀 바를 우호적인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는데, 일본에 대한 전통적인 華夷觀이 표출되어 있지 않다. 특히 蝦夷에서 蝦夷族과의 물물교환, 筆談과 詩書를 통한 松前人들과의 의사소통 등은 일본 동북쪽 지역과 조선의 교류라는 측면에서도 주목해야 할 사례이다. 조선후기에 동북아시아의 해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표류민 문제는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많이 발생하였는데, 특히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표류 문제를 통해서 지리적 해역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졌던 조선과 일본 사이의 표류민 송환 문제를 동북아시아 차원에서 규정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해역사를 새롭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이지항의 『표주록』은 중요한 표류민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의 『표주록』은 조선인으로서 최초의 蝦夷地 방문자가 남긴 체험적 기록이라는 점, 또 그 일행의 다양한 문화교류 활동을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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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인영래등록 속의 경상도 표류민과 해역 (역사와 경계 103호, 2017.06.30)
| 17~18세기 중반에 경상도 연안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했던 표류민은 동북아시아의 해역을 설명해 주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조선후기의 자료 『漂人領來謄錄』에는 일본으로 표류했던 경상도인의 표류사례 142건이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의 표류민은 바람과 해류의 영향으로 경상도 동해안에서 표류할 경우 일본의 표착지는 對馬 70건, 長門 39건, 筑前 18건, 石見 11건으로 4개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표착 후에 표류민은 長崎나 對馬島를 거쳐서 조선 동래부로 송환되었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의 표류민 송환은 국가 사이의 절차를 따랐는데, 이것은 자연적인 우발적 사건에 인위적인 국가 사이의 체제가 작동하여 마무리되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경상도 표류민은 표착지에서 일본인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문화를 접하기도 했다. 17~18세기 중반에 경상도 표류민의 표류 시기는 해류와 바람의 영향으로 겨울철에 많이 발생하였는데, 경상도민이 표류선에 승선한 이유는 해상에서 어로 활동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경상도 표류민의 표류선에는 어로 활동 외에도 상업과 운송 등 다양한 이유로 同船한 경우도 있었다. 17~18세기 중반에 일본으로 표류한 경상도 표류민의 공통적인 특징은 한 배에 승선한 인원이 10명 내외로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농한기에 생활을 위해서 어로 활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조선 표류민은 일본에 표착한 후 먼저 일본 현지에서 인도적인 구호를 지원받은 후 長崎와 對馬島를 거쳐서 동래로 송환되었다. 조선 표류민의 송환은 대부분 대마도의 年例送使나 漂人領來差倭가 조선에 올 때 함께 왔다. 이러한 일본 사절에 대해서 조선에서는 예물을 준비하여 茶禮, 下船宴, 上船宴에 이르는 여러 차례의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원칙적으로 조선후기에는 표류민의 송환의 비용은 해당국에서 무상으로 부담하였다. 조선후기에 경상도 해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표류민 문제는 앞으로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인근 국가에 표류한 사례까지 검토함으로써 경상도 해역에서 발생했던 표류민 문제를 보다 구체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졌던 표류민의 송환 문제를 동아시아 차원에서 규정함으로써 해역사 연구를 새롭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조선후기에 경상도 연안에서 일본 연안으로 표류했던 경상도 표류민에 대한 연구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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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의 치국론과 의미(남명학 23호, 2018.03.30)
| 조선중기의 성리학 체계화 과정에서 사상에서는 의리와 실천을 강조하고, 정치에서는 현실의 모순에 대해 타협을 거부하며 적극적인 개혁을 주장한 南冥 曺植은 비판적 지식인이자 전형적인 處士였다. 이에 16세기의 현실 모순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현실정치에 대한 개혁책이 적극적으로 담겨 있는 남명의 4차례의 上疏를 토대로 남명의 정치 현실에 대한 治國論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서 남명의 치국론을 정치의 영역을 크게 지방정치와 중앙정치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남명의 치국론의 중요성은 지방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 남명은 현실 정치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16세기의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자신이 거주하던 지역사회의 안정이 필요하였다. 이에 재지사족이 향촌통제책을 행사할 수 있는 향촌자치론이 남명에게도 필요하였다. 남명의 문인들에 의해서 일어났던 毁家黜鄕은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아울러 재지 지주였던 양반의 입장에서 농경지의 경작을 위한 농민 계층의 안정이 필요하였는데, 이것은 조세제도의 공정성을 유지하고 부정을 방지하여 향민의 안정을 꾀해야 한다는 향민보호론으로 나타났다. 한편 남명은 조선중기의 절대군주제를 인정하고 君臣共治를 통해서 중앙의 정치가 안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남명은 먼저 군주의 수신과 덕치를 이상으로 하는 성학군주론을 주장하였다. 아울러 군주의 정치가 원활하게 집행되기 위해서 수령과 향리의 엄정한 선택과 부정․비리를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작동할 수 있는 행정체계론을 지지하였는데, 특히 인재의 등용을 중시하였다. 결론적으로 남명의 치국론은 지방과 중앙 정치의 영역에 맞게 주장되었다. 먼저 중앙정치에서는 위정자의 올바른 처신과 역할, 위정자의 수신과 솔선수범, 위정자와 신료들과의 소통의 중요성, 제도 시행의 엄정성, 국방의 자위성 확보와 주체적인 외교 문제였다. 지방정치에서는 향촌자치, 목민관의 솔선수범, 백성의 민생 안정, 관료의 부정부패와 비리 척결, 상하의 소통 문제였다. 남명은 시대정신에 따라 만들어진 정치형태를 부정과 편법을 통해 왜곡시키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시행해 나가는 것이 현실 개혁의 방향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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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ization of Sea Area of Northeastern Asia in 14-16th Centuries : Focusing on the Japanese Pirates(다문화사회연구, 2018년 4월호, 2018.03.16)
| Historically, sea areas in Northeastern Asia were the channel that connected the cultures and commodities in Ming(明)-Joseon(朝鮮)-Japan(日本) where clashes and conflicts existed as well. In the 14-16th centuries, the three states were under a tributary system based on a tribute-return exchange established since the Ming dynasty. However, there was a huge difference in the centralization of the state power between Joseon and Japan, which loosened the tributary system. In this era, Japanese pirates were very active under different forms. Previously, the studies on Japanese pirates mostly focused on the national history. The main subjects of those studies could be used to categorize by periods the piracy itself, the main agents of the pirates and the recognition of Japanese pirates from sea areas. The main problem of those studies is that they reflect the current views on the nation-state-territory, namely the approach of one nation’s history or the national history. The study of Japanese pirates should allow to make approaches on the piracy within the historical context of the 14-16th centuries-the expansion of trades, the distribution of silver, the failure of the Japanese’s closed-sea policy and the expansion of sea areas-in order to comprehend the historical meanings of Japanese pirates. Through the movement of people, goods and information, Japanese pirates of the 14-16th centuries were globalized. In this sense, it is inappropriate to call them Japanese pirates(倭寇), but the sea robber(海賊). Further studies should focus on the social changes by the association of low-class people, traders and the expansion of sea areas caused by pirate’s activities. Furthermore, we need to approach the problem with a multi-national point of view, rather than one national one, to understand it as a development of the contacts and exchanges among different regions rather than under a centralized control. Through the widening of our perspectives, we comprehend now the process of globalization of Japanese pirates and their impact on Northeastern Asia in the 14-16th centu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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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시기 일옹 최희량의 활동과 기억(이순신연구논총 28호, 2017.12.31) | 임진왜란 시기에 전라도 흥양현감으로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일옹 최희량(崔希亮)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최희량은 1560년(명종 15)에 태어나 1651년(효종 3)에 죽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정유재란 때 많은 활동을 했다. 최희량의 본관은 수성(隋城), 호는 일옹(逸翁)이다. 그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에는 아버지의 상중(喪中)이어서 전장에 나아가 싸우지 못하였다. 그는 1594년 무과에 급제한 후, 충청수사로 있던 장인 이계정(李繼鄭)을 돕도록 천거되어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흥양현감(興陽縣監)으로 이순신(李舜臣)의 아래에서 12차례 전공을 세웠으며, 적의 군량 800여 석을 탈취했으며, 포로 700여 명을 되돌려 왔다. 이에 이순신의 격찬을 받았지만,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서 지냈다. 병자호란 때는 나이가 많아서 직접 출전하지 못하고, 대신 아들을 보내어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扈從)하게 하였다. 최희량은 전쟁 중에 수군과 육군 지휘부의 갈등 등으로 모함을 받기도 했지만, 임진왜란 종전 이후에 전공을 인정받아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올랐다. 그는 1774년(영조 50)에는 향인들의 청원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00년(정조 24)에는 나주 향인들이 지은 忠逸祠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1871년(고종 8) 시호가 무숙(武肅)으로 추증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일옹집(逸翁集)』이 있는데, 시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보물로 지정된 「破倭報牒」은 임진왜란 시기에 전공에 관한 보고의 내용과 체계, 전투에 대한 전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
임진왜란기 양무공 김태허의 활동과 의미(한국민족문화 67호, 2018.05.31) | 임진왜란의 극복은 많은 인물들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임진왜란 후에 선정된 宣武原從功臣 9,060여 명의 명단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했던 그들의 업적이 제대로 알려져 있는 사례는 아직까지 제한적이다. 임진왜란 때 밀양 출신으로 울산을 중심으로 많은 전공을 세운 襄武公 金太虛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시기에 양무공 김태허의 활동은 밀양에서의 창의 이후, 울산 지역 관군의 장으로서 전투 참전과 지휘, 적정의 정탐 활동과 정보 수집과 보고, 군수 지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울산군은 임진왜란 이후 울산부로 승격되는데, 그 중심에는 울산군수 김태허의 활약이 있었다. 임진왜란 중 대부분의 시기에 일본군은 동남해안에 쌓은 倭城에 주둔하여 근거를 마련하고서 인근 지역을 약탈하면서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군도 일본군에 대한 상시적인 대비를 통해서 방어를 해야만 했다. 때문에 울산 지역은 임진왜란 전 시기에 걸쳐서 최전선이었다. 당시 울산에서는 김태허가 울산군수로서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는 관군과 의병을 통괄하면서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양무공 김태허가 임진왜란 시기에 세운 전공은 전쟁 전후에 관직의 제수, 포상과 현창의 과정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것은 전공에 대한 여러 차례의 陞差, 功臣의 선정, 祠宇의 건립, 諡號의 하사로 이어졌다. 이런 조치들을 통해서 양무공 김태허는 전쟁 이후에 지역사회에서도 鄕案에 入錄되었으며, 읍지의 인물조와 충렬조에 기재되면서 공적으로 인정되고 기억되어 나갔다. |
정유재란 시기 황석산성 전투의 전개와 의의(이순신연구논총 30, 2018.12) | 7년간 이어진 16세기 후반의 동북아시아 최대 전쟁 임진왜란에서는 많은 전투가 있었다. 정유재란 시기에 함양에서 있었던 대표적인 두 차례의 전투가 황석산성전투와 함양 사근역 부근 전투였다. 정유재란 때의 황석산성전투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전투사의 측면의 의미이다. 정유재란 시기에 황석산성전투는 함양 지역이 일본군의 전라도 침공로에 위치한 지리적 요인 때문에 전투가 발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일어났던 황석산성전투는 정유재란 시기에 경상도의 육지전투에서 있었던 실질적인 첫 정식 전투였다. 조선에서는 강화회담기에 준비했던 山城入保의 淸野策에 따라 안의, 거창, 함양의 세 군현의 軍․官․民이 황석산성에 들어가서 대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황석산성이 군사수의 열세 등으로 비록 함락되었지만, 청야책과 守城戰의 전개로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으며,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일정 부분 지연시켰다. 다음으로 정치사상사적 측면의 의미이다. 황석산성전투는 결과로 따지면 패배한 전투였지만, 조선후기 사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였던 전투였다. 임진왜란의 종전 이후 황석산성전투는 지속적으로 임진왜란을 기억하고 전승하는 현장이 되었다. 이것은 조선왕조가 성리학의 국가 이념을 강화하고 백성을 교화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황석산성전투에서 민․관․군이 하나가 되어 끝까지 최선을 다했음을 국가가 공인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황석산성전투는 역사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황석산성전투의 희생자들은 백성에 대한 모범 사례로 인정되어 기려 나가게 되었다. 그런 절차는 황석산성의 순절자에 대한 追贈, 復戶, 祠堂 건립, 諡號 제정, 旌表를 통해서 나타났다. 특히 안의현감 郭䞭은 三綱大節의 실천 모범 사례로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소개되었으며, 함양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열녀 등 정표자가 많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황석산성전투가 임진왜란 전체 전투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다. 황석산성전투는 정유재란 초기에 조선과 명군의 지원이 없이 고립 상태에서 민․관․군이 하나가 되어 지역방어를 수행하여 끝까지 일본군에게 항쟁했던 전투였다. 이런 점에서 황석산성전투는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이 준관군화 되어 활동했던 후기의병의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청도 지역 고성이씨 가문의 임진왜란 극복 양상(역사와 세계 54호, 2018.12) | 임진왜란 시기에 청도 지역에 거주했던 固城李氏 가문의 5의사는 다양한 형태로 전쟁을 극복하는데 기여하였다. 청도 지역의 고성이씨는 조선중기의 士禍期 이후에 안동에서 청도로 李育이 이주해 온 후 사족으로서 在地的 기반을 다져나간 가문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초기에 일본군의 침략을 받은 청도에서 고성이씨 가문의 인사들은 초기부터 청도 지역의 전쟁 극복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는데, 이것이 난 후에 청도 지역에서 향촌지배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시기에 청도 지역의 고성이씨 가문은 전쟁의 극복을 위해서 청도 지역과 다른 지역에서 전쟁 극복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먼저 청도 지역에서 密城朴氏 가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의병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에 비교적 빠른 시기에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던 청도의병에 李磬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李濂과 李澈 등이 활동하였다. 이들은 청도의병을 주도한 밀성박씨 가문 등과 합세하여 활동하였는데, 특히 李磬은 돌격장으로 활약하였다. 다음으로 가계가 분명하지 않은 李潛은 전라도 체찰사 鄭澈에 의해 邊士貞 휘하의 부대에 보내져서 副將으로 활약하다 계사년 진주성전투에 참가하여 순절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는 경상우도 고령의 吳澐 집안과 혼인으로 연결되며, 대구의 의병장이었던 蔡夢硯이 그의 비문을 작성하고 있다. 李海는 청도에서 창의하여 활약하다 정유재란 때 權慄의 諭書를 받고 남원성전투에 참가하여 순절하였던 인물인데, 絶命嗣와 義馬塚이 전해 온다. 정유재란 때의 활동과 관련하여서는 청도의 고성이씨 가문의 인사들이 郭再祐의 『火旺山城同苦錄』 등에 이름이 올라 있다. 이처럼 청도 고성이씨 가문의 5의사는 임진왜란 시기에 계속적으로 일본군과 대치하였던 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쟁 극복을 위한 다양한 항쟁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이 때문에 전쟁 후에 청도 지역의 항촌사회를 주도해 나갈 수 있는 대표적인 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 작성된 鄕案에 이름이 등재되었다. |
임진왜란기 충순당 이령의 의병 활동과 기억화(역사와경계 110호, 2019.03) |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는 육지의 의병 활동, 바다의 이순신 장군의 활약, 명군의 지원과 관군의 정비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제일 주목되는 것은 의병의 활약이었다.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은 조선 전역에서 조직적으로 일어났지만, 경상우도에서 가장 적극적이었다. 이 문제는 성리학의 발달과 연계해서 이해할 수 있다. 15세기 士禍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던 함안의 在地士族은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대표적인 영남의 성리학자 퇴계 李滉과 남명 曺植의 학문이 절충되는 지역으로서 학문적인 기반을 넓혀 나갔으며, 한강 鄭逑가 군수로 부임한 이후 학문적 진전이 일어났던 고장이었다. 충순당 이령 가문은 李好誠 때부터 함안의 지역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 나가면서 재지사족으로서 기반을 내렸다. 특히 이령 가문의 형제들은 외숙부인 안음의 갈천 林薰과 林芸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지역의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도모해 나갔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령도 성리학의 기본적인 가치인 忠과 孝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이에 충순당 이령은 임진왜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주저 없이 의병을 창의하여 100여 명을 모아서 김해부성으로 달려갔다. 그는 김해부사 徐禮元로부터 동문 수성의 임무를 부여받아 활약하였다. 이령은 김해부사 서예원이 도망한 후에 일본군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군사가 김해읍성을 공격해 오자, 피하지 않고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그러나 그의 순절과 죽음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사라질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충순당 이령의 후손들과 지역인사들의 노력으로 임진왜란 시기에 활약했던 이령의 전공이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며,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사실로 기려지게 되었다. 먼저 임진왜란 이후 이령의 후손에게는 復戶의 혜택이 주어졌다. 다음으로 이령의 임진왜란 활동을 인정받기 위해서 후손들과 지역인사들은 上言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여론을 환기하여 旌閭를 받았다. 마지막으로는 후손 李文爀이 3차례 擊錚을 통해서 贈職을 받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300여 년이 지났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이령의 순절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에 정려각 충순당의 건립과 추증 교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조선왕조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지역의 의병장이라도 지역사회의 노력으로 공적을 인정받아서 후대에 기억할 수 있게 한 사례이며, 그러한 절차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이방익 표해록 속의 표류민과 해역 세계(역사와 세계 55, 2019.06) | 조선후기에 청나라의 복건성 澎湖島에 표류했다가 돌아와서 漂海錄을 남긴 李邦翼의 가문은 星州李氏로 제주도에 세거해 온 武人 가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장을 지낸 李光彬이다. 이방익은 1784년(정조 8)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忠壯將·오위장·全州中軍 등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는 충장장으로 있을 때인 1796년 9월 제주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청나라의 福建省 澎湖島에 표착하여 臺灣·廈門·浙江·江南·北京·義州를 거쳐 1797년 윤6월 20일에 한성에 도착하였다. 그는 국문으로 「漂海歌」를 지었으며, 漂海錄을 남겼다. 현재 이들 기록과 관련되는 다양한 자료들이 남아 있다. 이방익 일행은 복건성 팽호도에 표착한 이후 청나라에서 問情을 받은 후 인도적인 구호조처를 받으면서 북경으로 이송되었다. 이 과정에서 현지인들과 접촉하면서 청나라의 이국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대화는 이방익이 한자를 알고 있어서 가능했는데, 그는 귀국 후에 심문 과정과 정조의 관심으로 그동안 기록해 두었던 자료를 토대로 표류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이방익이 표류한 해역은 제주에서 臺灣에 이르는 동아시아의 해역이었는데, 그의 일행은 대만을 거쳐 복건성 하문으로 건너가 청나라의 육지에 상륙하였다. 이후 청나라의 대륙을 거쳐 北京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의주를 거쳐 귀국할 수 있었다. 이방익은 귀국 과정에 의주에서 받은 심문에서 표류 과정에 대해서 진술하였으며, 이때 소지품도 검열 당하였다. 당시의 소지 품목은 청나라에서 구호품으로 받은 것이었지만, 자신들의 물품과 교환한 것도 있었다. 이방익 일행의 표류민 송환은 청나라와 조선의 송환체제가 작동하여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이방익이 남긴 「漂海歌」와 漂海錄을 통해서 조선에서 동아시아 해역에 속한 대만으로 표류하는 경우 청을 통해서 송환되어 왔으며, 이러한 표류를 통해서 대만과 청의 江南에 대한 문물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
| 임진왜란 시기 부산포의 위상과 해전(항도부산 39, 2020.02) |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4월 14일 부산포는 일본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관할 경상좌수사 朴泓과 인근의 경상우수사 元均의 도망으로 전선이 와해되었기 때문이었다. 부산진성에서 부산진첨사 정발이 분전하였지만, 일본군은 부산포를 함락하여 교두보로 삼아 임진왜란 초기 전황을 원만하게 주도해 나갈 수 있었다. 이후 부산포는 일본군의 주둔 기지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일본 수군의 많은 전선과 군사가 주둔하면서 운송 기지 역할을 하였다. 부산포해전은 임진왜란 시기에 부산포가 일본군의 교두보와 병참 기지 역할을 할 때, 일본군의 근거지를 타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투였다. 때문에 조선 수군의 연합 함대는 바깥 해양이 아니라 부산 포구 안의 적진으로 뛰어들어 전투를 수행하는 위험을 감수하였으며, 전술로도 一字로 펼치는 長蛇陣을 구사하였다. 이러한 전술은 조선 수군이 연합함대를 구축하여 부산포에 도착하기 전에 꾸준한 연습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부산포해전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두 수군이 연합하여 전함과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대승을 거둔 전투였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 시기의 전세를 바뀌게 할 만큼 획기적인 전투였다고 평가된다. 부산포해전의 패배 이후 일본 수군은 서해로의 진출이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동시에 육군의 진격도 어렵게 되었다. 또 수군의 패배로 일본 본국과의 교통과 보급도 지장을 받아서 일본군은 반도에서 고립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일본도 강화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반면 조선 측에서는 일본군의 군량 공급로와 보급기지를 직접 공략하여 대첩을 거둠으로써 회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부산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지형상의 불리함이나 전선과 군사수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연합함대를 구축하고, 연합 훈련을 통해서 익혔던 유용한 전술을 구사하였다. 또 이순신은 직접 장거리 이동, 육지에 주둔한 일본군과의 전투라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부산포해전에서는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다. 결론적으로 부산포해전은 임진왜란 시기의 여러 해전 중에서 일본의 전선을 많이 깨트린 大捷 중의 하나로 평가되며, 일본 수군의 기동력을 약화시켜 임진전쟁사 전체의 흐름에 막대한 영향을 준 전투의 승리였다. 이에 조선 수군의 방어 영역은 일본군이 주둔하는 부산 해안으로만 축소되어 한동안 조선군이 일본군에 대해서 안정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다. 부산포해전은 임진왜란 4대 해전으로 평가되며, 전투의 규모와 영향 면에서 부산포대첩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아진다. |
| 15∼16세기 朝鮮과 琉球의 해역 이동(해항도시문화교섭학 24, 2021.04) | 15세∼16세기에 조선과 유구 사이에는 해역 이동을 통한 다양한 物類의 이동이 있었다. 다만 明 중심의 海禁政策 시행으로 정치행위로서의 朝貢과 경제행위로서의 무역 사이의 모순이 드러났던 시기였다. 이때 유구는 명나라의 조공제도에 참여하였지만, 조공제도를 전제로 하지 않는 점이 특징이었다. 이에 유구는 동아시아 해역의 교역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활발한 민간교역을 이끌어 나갔다.15∼16세기 조선과 유구 사이를 物類 이동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 물품, 정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두 나라 사이의 사람 이동은 사절 파견, 僞使, 피로인, 표류민으로 나눌 수 있다. 물품의 이동은 무역을 통해 이뤄졌는데, 국가 차원의 공무역과 사무역이 동시에 이뤄졌다. 양국 사이의 접촉을 통해 상대국이 보완할 수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정보도 이동·보급되었다. 조선과 유구는 15∼16세기에 걸쳐 동아시아 해역에서 다양한 물류의 이동을 통해 활발하게 교류하였다15∼16세기 조선과 유구 사이의 해역은 먼 거리였기 때문에 일부 직접 항로가 사용되었지만, 대부분은 일본 九州를 경유했다. 이 경우 일본의 博多 상인들이 중개역할을 했지만, 對馬島 상인들이 개입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과 유구의 해역을 이동하는 과정은 해류, 조류, 바람이라는 자연현상을 극복해야 했기 때문에 일정한 제약이 있었다. 두 나라는 이를 극복하면서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갔지만, 동아시아 해역에서 포르투갈 상인의 진입과 2차 왜구의 활동으로 명을 경유한 간접교류가 이뤄졌다. 이로 인해 두 나라 사이의 해역 이동은 단절되었다. |
| 조선 후기의 선원 조직과 선박 운영(역사와 경계 122, 2022.04) | 한국 선원의 역사에서 조선 후기의 船員이 차지하는 의미는 전근대적 선원에서 근대적 선원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선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배의 역사와 함께 선원의 존재가 출현했지만, 초기 선원은 대부분 漁撈人과 水軍의 역할을 겸하였지만, 군사제도가 정비되면서 점차 역할이 다른 직능의 선원으로 분화되어 나갔다. 근대에 이르러 선원은 수군이 海軍으로 군사 업무로 역할이 완전히 분리되어 나가자, 본래의 선원은 漁船과 商船에서 활동하는 선원으로 일원화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조선 후기의 선원은 근대 해운업의 성장과 함께 나타나는 상선의 선원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단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조선 후기 선원이 근대 선원으로의 변화 과정을 나름대로 살펴보았다. 조선 후기에 선원이 근대 선원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선원의 조직에서 나타나는 직능의 분화와 업무의 전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아울러 선박의 운영에서는 선원의 지위 향상과 선원 노동자에 대한 임금의 지급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해운업이 발달하면서 관선인 軍船을 제외하면 대부분 私船이 업무를 대체해 나갔다. 이에 따라 선박의 운영도 관영제는 군선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나머지는 대부분 사영제로 운영되었다. 우선 조선 후기의 선원 조직에서는 비록 특수한 경우이지만, 통신사선에서는 상층 선원과 하층 선원 및 부속 선원으로 직능이 분화되어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런 모습은 선박이 대형화한다면 근대 상선에서 보이는 선원 조직과 직능의 분화가 적용되어 진행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군선에서도 군역의 布納化 과정에서 役價를 지급 받는 수군으로 충원되어 나갔다는 점은 선원의 지위가 향상되는 모습으로 파악할 수 있어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조선 후기의 선박 운영에서는 官營制보다는 私營制로 나아가고 모습을 다양하게 확인할 수 있다. 즉 物主나 船商이 선박을 이용하여 해운 활동에 종사하게 되자 身役에서 벗어나는 선원의 존재, 軍役을 納布로 대신하는 행위, 임금을 지급 받는 선원의 출현, 물주와 선주가 운송업으로 자본을 축적하는 모습 등은 근대적인 선원과 해운업으로 나아가는 전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 조선후기 경상도 주민의 일본 표착과 송환(해항도시문화교섭학 26, 2022.04) | 조선후기에 조선 표착민이 일본에 표착하면 국가 권력 사이의 외교권 속에서 형성된 송환체제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일본 중세 국가의 국가 권력이 일원화되지 못하여 조선과의 다원적인 체제가 작동하였지만, 조선후기에는 일본 근세 국가가 외교권을 독점함으로써 표착민 송환에서 단일체제가 작동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과의 교린체제로 유지함으로써 조선과 對馬島 사이의 조공적 관계를 유지하는 이중 구조를 계속 유지하였다. 이에 대마도의 양속성을 배제하고 표착민 송환을 말하는 것은 국가이념만을 강조하는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입장에서 동북아시아 조일 해역에서 발생한 표착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국가와 국가의 문제였지만, 동시에 국가와 지역의 문제였다. 그러나 전근대시기에 지역과 지역 사이의 직접적인 교섭보다는 국가를 통한 간접적인 절차와 교섭이 진행되었다. 이에 경상도 해안에서 표류하여 일본 해안에 표착한 조선의 경상도 표착민도 대마도와 부산이라는 지역을 통한 접촉과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고, 시제로는 중앙 권력에 의해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후기에 조일 사이에서 표류민이 발생했던 표류 해역은 지리적・물리적 해역의 존재를 말해준다. 경상도 연안에서도 표류가 발생하는 원인은 연안의 돌풍이나 강풍이었는데, 조류나 기상이변을 주목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경상도 연안에서 가장 많은 표류사고를 당한 울산인들의 40%가 나가토・이와미・치쿠젠에 표착했으며, 장기・경주・영해・영덕인들은 대마도보다도 나가토・이와미・치쿠젠에 많이 표착하였다. 조일 해역에서 발생했던 경상도 표류민은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어업 활동보다는 상업 활동을 하다가 표류당하는 경향이 높아갔다. 조선후기에 일본에 표착한 조선인의 송환 문제는 표착지였던 일본과 송환지 조선에서 두 차례 진행되었다. 일본에서 연안 표착민을 조선으로 송환하는 절차는 도쿠가와 바쿠후 주도로 행하였다. 일본의 혼슈나 큐슈에 표착했을 때는 나가사키로 보냈는데, 나가사키에서 쓰시마를 거쳐서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반면 쓰시마에 표착했을 때는 우선 후츄로 보내졌으며, 여기에서 와니우라나 사스나를 경유하여 동래로 송환되었다. 조선에서는 조선후기에 쓰시마에서 표차왜를 앞세워 조선인 표착민을 송환해 오면 접대는 경상도의 동래에서 진행되어 지역에서 많은 부담이 되었다. 구체적인 절차는 격군과 초탐장이 선박의 모양과 척수를 부산첨사에게 먼저 알리면, 부산진에서는 선박들을 초량왜관으로 인도하도록 한 후 구체적인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동래부는 훈도와 별차가 가져온 서계와 노인을 예조에 보내어서 차왜 접대가 타당한 지의 여부를 검토한 후 접대하였다. 보통 茶禮, 下船宴(入船), 上船宴(出船)의 절차에 따라 연회를 모두 베풀어 주었는데, 鄕接慰官은 경상도의 수령이 맡아 진행하였다. |
| 임진전쟁의 객관적 서술을 위한 사료의 중요성(충무공 이순신과 한국 해양 , 2022.12.31) |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은 역사와 사회를 변화시키고, 개인의 의식과 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이러한 전쟁을 기록한 다양한 종류의 사료에는 전쟁 당사국의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때문에 전쟁 사료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고증이 요구된다. 임진전쟁에 대한 사료를 한국, 일본, 중국으로 비교하면 한국 측 자료가 가장 풍부하다. 이것은 조선이 양반이 통치하는 사회였으며, 전장(戰場)이 조선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임진전쟁 연구 방향과 성과를 토대로 앞으로의 임진전쟁 연구에서 사료를 활용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문화사의 시각이 필요하다. 과거에 전쟁은 주로 정치사의 범주에서 다루었다. 현재까지 한국사에서 전쟁을 문화사의 범주에서 다룬 예는 거의 없다. 임진전쟁이 역사에 끼친 영향을 고려하면 여러 시각에서 전쟁을 다룬 사료를 발굴하여 활용하여야 한다. 둘째, 역사학에도 보조과학이 필요하다. 대표적으로 임진전쟁에 대한 구체적 이해를 위해서는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을 참고할 수 있다. 임진전쟁 때의 전장터였던 성곽에 대해 유구를 직접 조사하여 전투 상황이나 무기 등도 유추해 낼 수 있다. 또 임진전쟁의 도검류(刀劍類)에 대한 화학적 분석을 통해서 당시 제철술(製鐵術)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셋째, 최근 역사학 연구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국가 중심의 역사 서술이다. 특히 국가를 역사의 단위로 하는 국가사의 문제점은 동아시아에서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다. 임진전쟁에 대한 일본의 역사 인식과 왜곡 문제도 심각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사상의 상호 인식과 역사 기억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동양 3국의 임진전쟁 사료에 대한 비교연구가 필요하다. 넷째, 지역 전투의 복원이나 지금까지의 임진전쟁 연구의 보완을 위해서도 일기와 실기(實記)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자료로 새롭게 발굴되는 일기 자료, 임진전쟁 관련 실기(實記) 가운데 독립된 책으로 유포되지 않은 자료를 발굴하여 활용하는 것이다. 다섯째, 사료의 다양화 노력과 지속적인 사료 발굴이 필요하다. 임진전쟁에 대한 미시사나 생활사 서술을 위해서 더욱 필요한 부분이다. 대표적으로 고문서는 전쟁 중 현장에서 사건과 동시에 작성한 기록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전쟁으로 인한 현실과 감정의 일상을 담고 있는 자료이다. 여섯째, 사료를 다양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언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임진전쟁 당사국이었던 조선, 명, 일본은 한자문화권에 속하여 많은 한문 사료를 각국에 남겼다. 연구자들의 한문 해독력이 필요하다. 나아가 16세기 전후에 동아시아에서 활동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외국어 습득이 요청된다, 앞으로도 임진전쟁 관련 사료를 발굴하는 노력이 계속 기울여지고, 이를 토대로 임진전쟁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전쟁 관련 국가의 다양한 노력이 한 차원 높은 임진전쟁의 역사를 서술해낼 것으로 기대한다. |
조선후기 의병장 정문부의 기억 양상(이순신연구논총 37, 2022.12.31, 308-347) | 국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기여했던 정문부(鄭文孚)는 관북 지방 의병장으로서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임진왜란 극복을 위해서 많은 공적을 세운 대표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후기에 의병장 정문부를 기억하는 모습을 붕당정치의 전개 속에서 살펴보았다. 임진왜란 직후 붕당정치 성립기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성리학 질서의 재확립과 실천이 시급한 문제였다. 이에 선조와 광해군 대에는 공신을 책훈하고 전쟁에서 활동하다 희생된 인물들에 대해 정리하였다. 의병장으로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쳐서 관북 지방을 지켜낸 정문부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올랐으며, 병조참판(兵曹參判) 등의 관직을 추증받았다. 본격적으로 붕당정치가 전개된 인조 이후에는 임진왜란 중에 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한 인물과 사례에 대한 발굴 작업을 통해서 지역사회에서 붕당의 기반을 다지고, 나아가 중앙정치에서 다른 붕당에 비해서 우위에 서려고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던 정문부는 이원익(李元翼)의 추천으로 기복(起復)되었다. 정문부를 기리는 종성의 창렬사(彰烈祠)와 경성의 현충사(顯忠祠)가 창건되었다. 현종 때에는 창렬사에 사액(賜額)이 내렸다. 숙종 때 충의(忠毅)란 시호를 받았으며, 초간본 『농포집(農圃集)』이 간행되었다. 북평사 최창대(崔昌大)가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건립하였으며, 17세기 말~18세기 말에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가 그려졌다. 이때 집권 세력 서인 계열의 민정중(閔鼎重)의 활동이 주목되는데, 이는 앞서 북평사를 역임한 서인 이식(李植)의 노력을 이은 것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붕당정치가 폐해를 드러내면서 탕평정치와 세도정치가 전개되자, 임진왜란의 기억을 발굴하거나 재생하여 지역사회에서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고, 나아가 중앙정치에 다시 진출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었다. 정문부는 정조 때 충신으로 정표(旌表)되었으며, 부조(不祧)의 은전을 받았다. 또 임진왜란 때 북도에서 순절했지만, 아직 사당에 배향되지 못한 인물들을 추가 배향하는 과정에서 정문부에 대한 기억도 재생되었다. 정문부는 부령의 창암사(靑巖祠)에 배향되었다. 철종 때 편찬된 김경복(金慶福)과 이몽서(李夢瑞)의 실기 『속정충록(續精忠錄)』에 실린 「쌍포대첩도(雙浦大捷圖)」를 통해서 정문부 의병의 활약상이 재현되었으며, 철종 때 신도비(神道碑)를 후손들이 용인에 다시 세웠다. |
| 임진전쟁 시기 주요 전투의 의미와 성격-대첩을 중심으로-(역사와경계 125, 2023.04.30, 41-81) | 임진전쟁 시기에 많은 전투가 있었다. 임진전쟁 시기에 있었던 65차례의 주요 육지 전투는 승패를 떠나 국난극복에 여러 측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大捷으로 평가되는 전투는 사전적 의미대로 큰 승리를 거둔 전투였기에 전쟁의 국면을 전환시켰다. 그런데 이미 알려져 있는 임진전쟁 3대첩은 조선시대에 평가자와 기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임진전쟁 3대첩을 비롯하여 전투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도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임진전쟁 시기에 전쟁 극복 과정에서 승리를 거두어 당대부터 대첩으로 평가받은 주요 육지 전투는 진주대첩, 행주대첩, 연안대첩, 북관대첩, 평양대첩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육지 전투들은 海戰의 승리와 함께 임진전쟁 극복에서 기억되어야 할 전투들이다. 육지 전투에서 대첩으로 평가된 金時敏의 진주대첩, 權慄의 행주대첩, 李廷馣의 연암대첩, 鄭文孚의 북관대첩,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평양대첩은 승리의 규모와 함께 전쟁의 국면을 바꾼 전투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측면이 널리 인식되어 대첩으로 높게 평가받아왔다. 임진전쟁 시기에 치러진 65차례의 전투의 의미와 평가가 종합적으로 검토되어 임진전쟁 전투사 전체에서 차지하는 개별 전투의 성격을 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서 임진전쟁극복이라는 문제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하나의 사례로 영천복성전투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임진전쟁 개전기에 있었던 永川復城戰鬪는 경상좌도에서 지역의 의병과 관군이 연합하여 승전을 거둔 전투였다. 영천복성전투는 守城이 아닌 탈환에 성공하여 복성한 대첩으로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영천복성전투의 의의는 임진전쟁 개전기 전투에서 보면 전투사나 지역사 측면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었으며, 큰 성과를 거둔 전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에 영천복성전투는 조선시대의 국가 기록이나 개인의 역사 기록에서 다양하게 영천대첩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영천복성전투는 영천대첩이나 승첩으로 평가해도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글에서 주목한 임진전쟁 시기의 전투에 대한 평가는 문헌 기록과 역사적 의미를 중심으로 한 것이어서 일정한 한계가 있다. 앞으로 군사사 측면에서 임진전쟁에서 수행되었던 전투 승리의 규모, 전과, 의미, 평가를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대첩을 규정한다면 다시 정리할 여지가 많이 있다. 이런 시각에서 임진전쟁 시기의 각 지역 전투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
부산 지역 해양문화유산의 활용 문제-정체성 형성을 중심으로-(해항도시문화교섭학 30, 2024.04.30, 207-244)
| 오늘날 부산은 해양수도를 표방한다. 부산은 대륙의 끝이 아니라 바다로 향한 출발지이며,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동북아시아의 중심지이자 관문이다. 이러한 부산의 도시 성격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해항도시의 성격과 해양문화의 특성을 나타내는 해양문화유산에 관한 관심이 절실하다. 2000년을 전후하여 부산 지역에서도 해양에 관한 관심과 연구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부합하는 해양문화유산의 활용이 필요하다. 부산 지역의 해양문화유산을 분류해 보면 형태별로는 유형문화유산 63점, 무형문화유산 26점, 자연유산 22점으로 전체 112점이다. 이를 분야별로 분류해 보면 정치 31점, 경제 28점, 사회 42점, 문화 11점이다. 부산 지역의 해양문화유산은 유형문화유산이 많으며, 분야별로는 정치, 경제, 사회 분야가 비슷한 분포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부산의 해양성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부산 지역의 해양문화유산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해양문화의 특성과 부산의 정체성를 부각시킬 수 있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부산의 해양성에서 비롯되어 부산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국방도시, 교역도시, 어업도시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것이 제대로 된 선박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다. 근대 조선소의 발상지에 선박 전문박물관을 건립하여 해양수도에 걸맞는 위상을 갖출 필요가 있다. 이것도 단순한 선박의 복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박의 역사, 문화, 활용 등을 종합적이고 구체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아울러 해양문화유산을 전시・체험할 수 있는 복합 전시시설이 해양박물관뿐 아니라 분야별로 특화되어 마련될 필요가 있다. 바다에 대한 기억을 다시 찾고 해양문화유산을 보존・활용하기 위해서는 복합적인 성격의 부산 해양박물관을 건립해야 한다. 이제라도 부산의 해양성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군사도시와 교역도시의 공간을 확보하여 갖추어 세우는 것이 요구된다. 군사도시의 면모는 수영강변의 경상좌수영, 자성대부두의 부산진성의 원형을 복원하는 것이다. 교역과 교류의 모습은 위상에 맞는 제대로 된 통신사 역사관의 건립, 초량왜관의 복원 추진이다. 이를 아우르는 공간으로 조선 후기의 부산진성(자성대) 일원을 추천한다. 그런데 부산 지역의 해양문화유산 활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다양한 해양문화유산의 발굴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해양문화유산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선행된 위에서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다. 사실 부산의 해양문화와 해양문화유산에 대한 소프트웨어는 많이 연구되어 있다. 이제는 부산의 해양문화와 해양문화유산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갖추어야 할 시점이다. 정말 과감한 발상의 전환과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
(지역과 역사 33, 2013. 10)
(역사와 경계 90, 2014.03)
(이순신논총 22, 2013.12)
(한국사상사학 46, 2014.04)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1, 2014.10)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2016.04.30)
(탐라문화 51, 2016.02.28)
(지역과 역사 38호, 2016.04.30)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6, 2017.04.30)
(역사와 경계 103호, 2017.06.30)
7년간 이어진 16세기 후반의 동북아시아 최대 전쟁 임진왜란에서는 많은 전투가 있었다. 정유재란 시기에 함양에서 있었던 대표적인 두 차례의 전투가 황석산성전투와 함양 사근역 부근 전투였다. 정유재란 때의 황석산성전투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전투사의 측면의 의미이다. 정유재란 시기에 황석산성전투는 함양 지역이 일본군의 전라도 침공로에 위치한 지리적 요인 때문에 전투가 발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일어났던 황석산성전투는 정유재란 시기에 경상도의 육지전투에서 있었던 실질적인 첫 정식 전투였다. 조선에서는 강화회담기에 준비했던 山城入保의 淸野策에 따라 안의, 거창, 함양의 세 군현의 軍․官․民이 황석산성에 들어가서 대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황석산성이 군사수의 열세 등으로 비록 함락되었지만, 청야책과 守城戰의 전개로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으며,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일정 부분 지연시켰다. 다음으로 정치사상사적 측면의 의미이다. 황석산성전투는 결과로 따지면 패배한 전투였지만, 조선후기 사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였던 전투였다. 임진왜란의 종전 이후 황석산성전투는 지속적으로 임진왜란을 기억하고 전승하는 현장이 되었다. 이것은 조선왕조가 성리학의 국가 이념을 강화하고 백성을 교화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황석산성전투에서 민․관․군이 하나가 되어 끝까지 최선을 다했음을 국가가 공인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황석산성전투는 역사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황석산성전투의 희생자들은 백성에 대한 모범 사례로 인정되어 기려 나가게 되었다. 그런 절차는 황석산성의 순절자에 대한 追贈, 復戶, 祠堂 건립, 諡號 제정, 旌表를 통해서 나타났다. 특히 안의현감 郭䞭은 三綱大節의 실천 모범 사례로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소개되었으며, 함양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열녀 등 정표자가 많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황석산성전투가 임진왜란 전체 전투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다. 황석산성전투는 정유재란 초기에 조선과 명군의 지원이 없이 고립 상태에서 민․관․군이 하나가 되어 지역방어를 수행하여 끝까지 일본군에게 항쟁했던 전투였다. 이런 점에서 황석산성전투는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이 준관군화 되어 활동했던 후기의병의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청나라의 복건성 澎湖島에 표류했다가 돌아와서 漂海錄을 남긴 李邦翼의 가문은 星州李氏로 제주도에 세거해 온 武人 가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장을 지낸 李光彬이다. 이방익은 1784년(정조 8)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忠壯將·오위장·全州中軍 등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는 충장장으로 있을 때인 1796년 9월 제주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청나라의 福建省 澎湖島에 표착하여 臺灣·廈門·浙江·江南·北京·義州를 거쳐 1797년 윤6월 20일에 한성에 도착하였다. 그는 국문으로 「漂海歌」를 지었으며, 漂海錄을 남겼다. 현재 이들 기록과 관련되는 다양한 자료들이 남아 있다. 이방익 일행은 복건성 팽호도에 표착한 이후 청나라에서 問情을 받은 후 인도적인 구호조처를 받으면서 북경으로 이송되었다. 이 과정에서 현지인들과 접촉하면서 청나라의 이국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대화는 이방익이 한자를 알고 있어서 가능했는데, 그는 귀국 후에 심문 과정과 정조의 관심으로 그동안 기록해 두었던 자료를 토대로 표류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이방익이 표류한 해역은 제주에서 臺灣에 이르는 동아시아의 해역이었는데, 그의 일행은 대만을 거쳐 복건성 하문으로 건너가 청나라의 육지에 상륙하였다. 이후 청나라의 대륙을 거쳐 北京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의주를 거쳐 귀국할 수 있었다. 이방익은 귀국 과정에 의주에서 받은 심문에서 표류 과정에 대해서 진술하였으며, 이때 소지품도 검열 당하였다. 당시의 소지 품목은 청나라에서 구호품으로 받은 것이었지만, 자신들의 물품과 교환한 것도 있었다. 이방익 일행의 표류민 송환은 청나라와 조선의 송환체제가 작동하여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이방익이 남긴 「漂海歌」와 漂海錄을 통해서 조선에서 동아시아 해역에 속한 대만으로 표류하는 경우 청을 통해서 송환되어 왔으며, 이러한 표류를 통해서 대만과 청의 江南에 대한 문물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4월 14일 부산포는 일본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관할 경상좌수사 朴泓과 인근의 경상우수사 元均의 도망으로 전선이 와해되었기 때문이었다. 부산진성에서 부산진첨사 정발이 분전하였지만, 일본군은 부산포를 함락하여 교두보로 삼아 임진왜란 초기 전황을 원만하게 주도해 나갈 수 있었다. 이후 부산포는 일본군의 주둔 기지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일본 수군의 많은 전선과 군사가 주둔하면서 운송 기지 역할을 하였다. 부산포해전은 임진왜란 시기에 부산포가 일본군의 교두보와 병참 기지 역할을 할 때, 일본군의 근거지를 타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투였다. 때문에 조선 수군의 연합 함대는 바깥 해양이 아니라 부산 포구 안의 적진으로 뛰어들어 전투를 수행하는 위험을 감수하였으며, 전술로도 一字로 펼치는 長蛇陣을 구사하였다. 이러한 전술은 조선 수군이 연합함대를 구축하여 부산포에 도착하기 전에 꾸준한 연습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부산포해전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두 수군이 연합하여 전함과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대승을 거둔 전투였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 시기의 전세를 바뀌게 할 만큼 획기적인 전투였다고 평가된다. 부산포해전의 패배 이후 일본 수군은 서해로의 진출이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동시에 육군의 진격도 어렵게 되었다. 또 수군의 패배로 일본 본국과의 교통과 보급도 지장을 받아서 일본군은 반도에서 고립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일본도 강화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반면 조선 측에서는 일본군의 군량 공급로와 보급기지를 직접 공략하여 대첩을 거둠으로써 회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부산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지형상의 불리함이나 전선과 군사수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연합함대를 구축하고, 연합 훈련을 통해서 익혔던 유용한 전술을 구사하였다. 또 이순신은 직접 장거리 이동, 육지에 주둔한 일본군과의 전투라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부산포해전에서는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다. 결론적으로 부산포해전은 임진왜란 시기의 여러 해전 중에서 일본의 전선을 많이 깨트린 大捷 중의 하나로 평가되며, 일본 수군의 기동력을 약화시켜 임진전쟁사 전체의 흐름에 막대한 영향을 준 전투의 승리였다. 이에 조선 수군의 방어 영역은 일본군이 주둔하는 부산 해안으로만 축소되어 한동안 조선군이 일본군에 대해서 안정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다. 부산포해전은 임진왜란 4대 해전으로 평가되며, 전투의 규모와 영향 면에서 부산포대첩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아진다.
15세∼16세기에 조선과 유구 사이에는 해역 이동을 통한 다양한 物類의 이동이 있었다. 다만 明 중심의 海禁政策 시행으로 정치행위로서의 朝貢과 경제행위로서의 무역 사이의 모순이 드러났던 시기였다. 이때 유구는 명나라의 조공제도에 참여하였지만, 조공제도를 전제로 하지 않는 점이 특징이었다. 이에 유구는 동아시아 해역의 교역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활발한 민간교역을 이끌어 나갔다.15∼16세기 조선과 유구 사이를 物類 이동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 물품, 정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두 나라 사이의 사람 이동은 사절 파견, 僞使, 피로인, 표류민으로 나눌 수 있다. 물품의 이동은 무역을 통해 이뤄졌는데, 국가 차원의 공무역과 사무역이 동시에 이뤄졌다. 양국 사이의 접촉을 통해 상대국이 보완할 수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정보도 이동·보급되었다. 조선과 유구는 15∼16세기에 걸쳐 동아시아 해역에서 다양한 물류의 이동을 통해 활발하게 교류하였다15∼16세기 조선과 유구 사이의 해역은 먼 거리였기 때문에 일부 직접 항로가 사용되었지만, 대부분은 일본 九州를 경유했다. 이 경우 일본의 博多 상인들이 중개역할을 했지만, 對馬島 상인들이 개입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과 유구의 해역을 이동하는 과정은 해류, 조류, 바람이라는 자연현상을 극복해야 했기 때문에 일정한 제약이 있었다. 두 나라는 이를 극복하면서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갔지만, 동아시아 해역에서 포르투갈 상인의 진입과 2차 왜구의 활동으로 명을 경유한 간접교류가 이뤄졌다. 이로 인해 두 나라 사이의 해역 이동은 단절되었다.
한국 선원의 역사에서 조선 후기의 船員이 차지하는 의미는 전근대적 선원에서 근대적 선원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선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배의 역사와 함께 선원의 존재가 출현했지만, 초기 선원은 대부분 漁撈人과 水軍의 역할을 겸하였지만, 군사제도가 정비되면서 점차 역할이 다른 직능의 선원으로 분화되어 나갔다. 근대에 이르러 선원은 수군이 海軍으로 군사 업무로 역할이 완전히 분리되어 나가자, 본래의 선원은 漁船과 商船에서 활동하는 선원으로 일원화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조선 후기의 선원은 근대 해운업의 성장과 함께 나타나는 상선의 선원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단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조선 후기 선원이 근대 선원으로의 변화 과정을 나름대로 살펴보았다.
조선 후기에 선원이 근대 선원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선원의 조직에서 나타나는 직능의 분화와 업무의 전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아울러 선박의 운영에서는 선원의 지위 향상과 선원 노동자에 대한 임금의 지급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해운업이 발달하면서 관선인 軍船을 제외하면 대부분 私船이 업무를 대체해 나갔다. 이에 따라 선박의 운영도 관영제는 군선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나머지는 대부분 사영제로 운영되었다.
우선 조선 후기의 선원 조직에서는 비록 특수한 경우이지만, 통신사선에서는 상층 선원과 하층 선원 및 부속 선원으로 직능이 분화되어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런 모습은 선박이 대형화한다면 근대 상선에서 보이는 선원 조직과 직능의 분화가 적용되어 진행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군선에서도 군역의 布納化 과정에서 役價를 지급 받는 수군으로 충원되어 나갔다는 점은 선원의 지위가 향상되는 모습으로 파악할 수 있어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조선 후기의 선박 운영에서는 官營制보다는 私營制로 나아가고 모습을 다양하게 확인할 수 있다. 즉 物主나 船商이 선박을 이용하여 해운 활동에 종사하게 되자 身役에서 벗어나는 선원의 존재, 軍役을 納布로 대신하는 행위, 임금을 지급 받는 선원의 출현, 물주와 선주가 운송업으로 자본을 축적하는 모습 등은 근대적인 선원과 해운업으로 나아가는 전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에 조선 표착민이 일본에 표착하면 국가 권력 사이의 외교권 속에서 형성된 송환체제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일본 중세 국가의 국가 권력이 일원화되지 못하여 조선과의 다원적인 체제가 작동하였지만, 조선후기에는 일본 근세 국가가 외교권을 독점함으로써 표착민 송환에서 단일체제가 작동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과의 교린체제로 유지함으로써 조선과 對馬島 사이의 조공적 관계를 유지하는 이중 구조를 계속 유지하였다. 이에 대마도의 양속성을 배제하고 표착민 송환을 말하는 것은 국가이념만을 강조하는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입장에서 동북아시아 조일 해역에서 발생한 표착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국가와 국가의 문제였지만, 동시에 국가와 지역의 문제였다. 그러나 전근대시기에 지역과 지역 사이의 직접적인 교섭보다는 국가를 통한 간접적인 절차와 교섭이 진행되었다. 이에 경상도 해안에서 표류하여 일본 해안에 표착한 조선의 경상도 표착민도 대마도와 부산이라는 지역을 통한 접촉과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고, 시제로는 중앙 권력에 의해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후기에 조일 사이에서 표류민이 발생했던 표류 해역은 지리적・물리적 해역의 존재를 말해준다. 경상도 연안에서도 표류가 발생하는 원인은 연안의 돌풍이나 강풍이었는데, 조류나 기상이변을 주목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경상도 연안에서 가장 많은 표류사고를 당한 울산인들의 40%가 나가토・이와미・치쿠젠에 표착했으며, 장기・경주・영해・영덕인들은 대마도보다도 나가토・이와미・치쿠젠에 많이 표착하였다. 조일 해역에서 발생했던 경상도 표류민은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어업 활동보다는 상업 활동을 하다가 표류당하는 경향이 높아갔다.
조선후기에 일본에 표착한 조선인의 송환 문제는 표착지였던 일본과 송환지 조선에서 두 차례 진행되었다. 일본에서 연안 표착민을 조선으로 송환하는 절차는 도쿠가와 바쿠후 주도로 행하였다. 일본의 혼슈나 큐슈에 표착했을 때는 나가사키로 보냈는데, 나가사키에서 쓰시마를 거쳐서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반면 쓰시마에 표착했을 때는 우선 후츄로 보내졌으며, 여기에서 와니우라나 사스나를 경유하여 동래로 송환되었다.
조선에서는 조선후기에 쓰시마에서 표차왜를 앞세워 조선인 표착민을 송환해 오면 접대는 경상도의 동래에서 진행되어 지역에서 많은 부담이 되었다. 구체적인 절차는 격군과 초탐장이 선박의 모양과 척수를 부산첨사에게 먼저 알리면, 부산진에서는 선박들을 초량왜관으로 인도하도록 한 후 구체적인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동래부는 훈도와 별차가 가져온 서계와 노인을 예조에 보내어서 차왜 접대가 타당한 지의 여부를 검토한 후 접대하였다. 보통 茶禮, 下船宴(入船), 上船宴(出船)의 절차에 따라 연회를 모두 베풀어 주었는데, 鄕接慰官은 경상도의 수령이 맡아 진행하였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은 역사와 사회를 변화시키고, 개인의 의식과 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이러한 전쟁을 기록한 다양한 종류의 사료에는 전쟁 당사국의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때문에 전쟁 사료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고증이 요구된다. 임진전쟁에 대한 사료를 한국, 일본, 중국으로 비교하면 한국 측 자료가 가장 풍부하다. 이것은 조선이 양반이 통치하는 사회였으며, 전장(戰場)이 조선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임진전쟁 연구 방향과 성과를 토대로 앞으로의 임진전쟁 연구에서 사료를 활용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문화사의 시각이 필요하다. 과거에 전쟁은 주로 정치사의 범주에서 다루었다. 현재까지 한국사에서 전쟁을 문화사의 범주에서 다룬 예는 거의 없다. 임진전쟁이 역사에 끼친 영향을 고려하면 여러 시각에서 전쟁을 다룬 사료를 발굴하여 활용하여야 한다. 둘째, 역사학에도 보조과학이 필요하다. 대표적으로 임진전쟁에 대한 구체적 이해를 위해서는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을 참고할 수 있다. 임진전쟁 때의 전장터였던 성곽에 대해 유구를 직접 조사하여 전투 상황이나 무기 등도 유추해 낼 수 있다. 또 임진전쟁의 도검류(刀劍類)에 대한 화학적 분석을 통해서 당시 제철술(製鐵術)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셋째, 최근 역사학 연구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국가 중심의 역사 서술이다. 특히 국가를 역사의 단위로 하는 국가사의 문제점은 동아시아에서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다. 임진전쟁에 대한 일본의 역사 인식과 왜곡 문제도 심각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사상의 상호 인식과 역사 기억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동양 3국의 임진전쟁 사료에 대한 비교연구가 필요하다.
넷째, 지역 전투의 복원이나 지금까지의 임진전쟁 연구의 보완을 위해서도 일기와 실기(實記)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자료로 새롭게 발굴되는 일기 자료, 임진전쟁 관련 실기(實記) 가운데 독립된 책으로 유포되지 않은 자료를 발굴하여 활용하는 것이다. 다섯째, 사료의 다양화 노력과 지속적인 사료 발굴이 필요하다. 임진전쟁에 대한 미시사나 생활사 서술을 위해서 더욱 필요한 부분이다. 대표적으로 고문서는 전쟁 중 현장에서 사건과 동시에 작성한 기록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전쟁으로 인한 현실과 감정의 일상을 담고 있는 자료이다. 여섯째, 사료를 다양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언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임진전쟁 당사국이었던 조선, 명, 일본은 한자문화권에 속하여 많은 한문 사료를 각국에 남겼다. 연구자들의 한문 해독력이 필요하다. 나아가 16세기 전후에 동아시아에서 활동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외국어 습득이 요청된다,
앞으로도 임진전쟁 관련 사료를 발굴하는 노력이 계속 기울여지고, 이를 토대로 임진전쟁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전쟁 관련 국가의 다양한 노력이 한 차원 높은 임진전쟁의 역사를 서술해낼 것으로 기대한다.
조선후기 의병장 정문부의 기억 양상(이순신연구논총 37, 2022.12.31, 308-347)
국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기여했던 정문부(鄭文孚)는 관북 지방 의병장으로서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임진왜란 극복을 위해서 많은 공적을 세운 대표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후기에 의병장 정문부를 기억하는 모습을 붕당정치의 전개 속에서 살펴보았다.
임진왜란 직후 붕당정치 성립기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성리학 질서의 재확립과 실천이 시급한 문제였다. 이에 선조와 광해군 대에는 공신을 책훈하고 전쟁에서 활동하다 희생된 인물들에 대해 정리하였다. 의병장으로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쳐서 관북 지방을 지켜낸 정문부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올랐으며, 병조참판(兵曹參判) 등의 관직을 추증받았다.
본격적으로 붕당정치가 전개된 인조 이후에는 임진왜란 중에 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한 인물과 사례에 대한 발굴 작업을 통해서 지역사회에서 붕당의 기반을 다지고, 나아가 중앙정치에서 다른 붕당에 비해서 우위에 서려고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던 정문부는 이원익(李元翼)의 추천으로 기복(起復)되었다. 정문부를 기리는 종성의 창렬사(彰烈祠)와 경성의 현충사(顯忠祠)가 창건되었다. 현종 때에는 창렬사에 사액(賜額)이 내렸다. 숙종 때 충의(忠毅)란 시호를 받았으며, 초간본 『농포집(農圃集)』이 간행되었다. 북평사 최창대(崔昌大)가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건립하였으며, 17세기 말~18세기 말에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가 그려졌다. 이때 집권 세력 서인 계열의 민정중(閔鼎重)의 활동이 주목되는데, 이는 앞서 북평사를 역임한 서인 이식(李植)의 노력을 이은 것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붕당정치가 폐해를 드러내면서 탕평정치와 세도정치가 전개되자, 임진왜란의 기억을 발굴하거나 재생하여 지역사회에서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고, 나아가 중앙정치에 다시 진출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었다. 정문부는 정조 때 충신으로 정표(旌表)되었으며, 부조(不祧)의 은전을 받았다. 또 임진왜란 때 북도에서 순절했지만, 아직 사당에 배향되지 못한 인물들을 추가 배향하는 과정에서 정문부에 대한 기억도 재생되었다. 정문부는 부령의 창암사(靑巖祠)에 배향되었다. 철종 때 편찬된 김경복(金慶福)과 이몽서(李夢瑞)의 실기 『속정충록(續精忠錄)』에 실린 「쌍포대첩도(雙浦大捷圖)」를 통해서 정문부 의병의 활약상이 재현되었으며, 철종 때 신도비(神道碑)를 후손들이 용인에 다시 세웠다.
임진전쟁 시기에 많은 전투가 있었다. 임진전쟁 시기에 있었던 65차례의 주요 육지 전투는 승패를 떠나 국난극복에 여러 측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大捷으로 평가되는 전투는 사전적 의미대로 큰 승리를 거둔 전투였기에 전쟁의 국면을 전환시켰다. 그런데 이미 알려져 있는 임진전쟁 3대첩은 조선시대에 평가자와 기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임진전쟁 3대첩을 비롯하여 전투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도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임진전쟁 시기에 전쟁 극복 과정에서 승리를 거두어 당대부터 대첩으로 평가받은 주요 육지 전투는 진주대첩, 행주대첩, 연안대첩, 북관대첩, 평양대첩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육지 전투들은 海戰의 승리와 함께 임진전쟁 극복에서 기억되어야 할 전투들이다. 육지 전투에서 대첩으로 평가된 金時敏의 진주대첩, 權慄의 행주대첩, 李廷馣의 연암대첩, 鄭文孚의 북관대첩,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평양대첩은 승리의 규모와 함께 전쟁의 국면을 바꾼 전투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측면이 널리 인식되어 대첩으로 높게 평가받아왔다.
임진전쟁 시기에 치러진 65차례의 전투의 의미와 평가가 종합적으로 검토되어 임진전쟁 전투사 전체에서 차지하는 개별 전투의 성격을 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서 임진전쟁극복이라는 문제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하나의 사례로 영천복성전투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임진전쟁 개전기에 있었던 永川復城戰鬪는 경상좌도에서 지역의 의병과 관군이 연합하여 승전을 거둔 전투였다. 영천복성전투는 守城이 아닌 탈환에 성공하여 복성한 대첩으로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영천복성전투의 의의는 임진전쟁 개전기 전투에서 보면 전투사나 지역사 측면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었으며, 큰 성과를 거둔 전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에 영천복성전투는 조선시대의 국가 기록이나 개인의 역사 기록에서 다양하게 영천대첩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영천복성전투는 영천대첩이나 승첩으로 평가해도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글에서 주목한 임진전쟁 시기의 전투에 대한 평가는 문헌 기록과 역사적 의미를 중심으로 한 것이어서 일정한 한계가 있다. 앞으로 군사사 측면에서 임진전쟁에서 수행되었던 전투 승리의 규모, 전과, 의미, 평가를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대첩을 규정한다면 다시 정리할 여지가 많이 있다. 이런 시각에서 임진전쟁 시기의 각 지역 전투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오늘날 부산은 해양수도를 표방한다. 부산은 대륙의 끝이 아니라 바다로 향한 출발지이며,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동북아시아의 중심지이자 관문이다. 이러한 부산의 도시 성격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해항도시의 성격과 해양문화의 특성을 나타내는 해양문화유산에 관한 관심이 절실하다. 2000년을 전후하여 부산 지역에서도 해양에 관한 관심과 연구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부합하는 해양문화유산의 활용이 필요하다.
부산 지역의 해양문화유산을 분류해 보면 형태별로는 유형문화유산 63점, 무형문화유산 26점, 자연유산 22점으로 전체 112점이다. 이를 분야별로 분류해 보면 정치 31점, 경제 28점, 사회 42점, 문화 11점이다. 부산 지역의 해양문화유산은 유형문화유산이 많으며, 분야별로는 정치, 경제, 사회 분야가 비슷한 분포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부산의 해양성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부산 지역의 해양문화유산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해양문화의 특성과 부산의 정체성를 부각시킬 수 있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부산의 해양성에서 비롯되어 부산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국방도시, 교역도시, 어업도시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것이 제대로 된 선박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다. 근대 조선소의 발상지에 선박 전문박물관을 건립하여 해양수도에 걸맞는 위상을 갖출 필요가 있다. 이것도 단순한 선박의 복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박의 역사, 문화, 활용 등을 종합적이고 구체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아울러 해양문화유산을 전시・체험할 수 있는 복합 전시시설이 해양박물관뿐 아니라 분야별로 특화되어 마련될 필요가 있다.
바다에 대한 기억을 다시 찾고 해양문화유산을 보존・활용하기 위해서는 복합적인 성격의 부산 해양박물관을 건립해야 한다. 이제라도 부산의 해양성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군사도시와 교역도시의 공간을 확보하여 갖추어 세우는 것이 요구된다. 군사도시의 면모는 수영강변의 경상좌수영, 자성대부두의 부산진성의 원형을 복원하는 것이다. 교역과 교류의 모습은 위상에 맞는 제대로 된 통신사 역사관의 건립, 초량왜관의 복원 추진이다. 이를 아우르는 공간으로 조선 후기의 부산진성(자성대) 일원을 추천한다.
그런데 부산 지역의 해양문화유산 활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다양한 해양문화유산의 발굴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해양문화유산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선행된 위에서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다. 사실 부산의 해양문화와 해양문화유산에 대한 소프트웨어는 많이 연구되어 있다. 이제는 부산의 해양문화와 해양문화유산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갖추어야 할 시점이다. 정말 과감한 발상의 전환과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