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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식 (HK교수/ 연구분야 : 한국 근세사, 한일 관계사)

논문
논문초록 
임진왜란 시기 경상도의 산성 축조와 전투
(지역과 역사 33, 2013. 10)

임진왜란 시기에 경상도의 낙동강 유역에는 山城이 집중적으로 축조되거나 보수되었다. 임진왜란 때 주요 산성 전투는 경상도 지역에서 이루어졌는데, 조선군에 승전과 패전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시기에 축조된 산성은 전쟁을 극복하는 데 전술과 전략 면에서 많은 기여를 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에 축조된 산성은 전술적으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주력 화기였던 鳥銃을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으로 널리 채택되었다. 아울러 산성을 활용한 방위법은 우리나라 전통의 방어 전략이 실현 가능성이 있으며, 또 우수함을 확인받은 대표적인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개항기 해항도시 부산의 절영도진 설치와 운영
(역사와 경계 90, 2014.03)
조선시대에 東萊府에 속한 가장 큰 섬이었던 절영도가 개항기에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에 釜山은 유일한 海港都市였지만, 개항을 전후하여 제국주의 세력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교류가 나타났다.
조선시대까지 絶影島에는 牧馬場, 神祠, 漁場, 假倭館이 있었다. 특히 절영도는 設鎭 이전에 국가의 주요 목마장으로 사용됐지만, 조선후기에 외국 선박이 출현하면서 부산항의 咽喉라는 지리적인 요인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시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개항기에 부산에는 일본인의 거주가 증가하였으며, 일본은 기존의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전관거류지를 설정하였다. 일본은 절영도에 불법적으로 病幕을 설치하였으며, 貯炭所를 설치하여 사용했다. 청나라와 영국도 부산에 영사관을 설치하였으며, 러시아도 절영도에 저탄소 설치를 청원하였다. 이러한 외세에 대비하고 개항장을 지키기 위한 국방상의 필요 때문에 1881년 절영도 中里에 水軍僉使의 鎭을 설치하면서 부산의 包伊, 開雲, 西平 3개 鎭을 혁파하였다. 절영도진은 設鎭 후 獨鎭으로 기능하였으며, 1895년 군제개혁으로 폐지되었다.
절영도진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으므로 운영에 반영되었다. 절영도진의 첨사는 15년 동안 13명이 재임했는데, 첨사직은 영전해 가는 중요 자리였다. 절영도진의 첨사는 좌수사의 관할 아래 있었지만, 감리서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절영도진에 소속된 군사는 440명이었으며, 전선에 속한 元防軍은 3,618명이었다. 절영도진의 

戰船은 2척이었는데, 각각 兵船 1척과 伺候船 2척이 배속되었다. 절영도진의 운영 수입을 錢으로 환산하면 전체 11,326냥이었지만, 上納分을 제외하면 집행 가능한 실제 수입은 7,522냥이었다. 절영도진의 지출은 廩況 
3,852냥, 砲米 367냥 등이었다.
개항으로 부산이 해항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절영도진은 외세 방어를 위해서 설치되었다. 이에 절영도는 기존의 牧馬場에서 군사 防禦鎭으로 변하여 기능을 하였지만, 廢鎭 이후에는 외세의 租借地가 되고 말았다.


이충무공전서의 편찬 배경과 내용
(이순신논총 22, 2013.12)
이 글은『李忠武公全書』의 편찬 배경과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기 위해 작성된 글이다.『이충무공전서』는 조선시대에 正祖의 명으로 1795년에 14권 8책으로 간행되었다. 正祖는 이 전서의 서론에 해당하는 綸音과 神道碑名을 직접 지었으며, 발간 비용을 지원하였다.
정조가『이충무공전서』의 간행을 지시한 1792년은 天主敎 문제로 사상 논쟁이 일어났던 혼란한 시대 상황이었다. 정조는 사상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老論의 정신적 지주인 宋時烈을 文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한편으로 이순신을 武의 상징으로 내세워 노론 중심의 정치적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다. 아울러 이순신을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극복의 민족적 영웅이라는 차원보다는 군주에 대한 의리를 다한 忠臣의 상징으로 내세워 왕조의 체제를 안정․유지시키는 방편으로 삼고자 했다.
『이충무공전서』는 총 1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에는 綸音, 碑銘, 卷首가 편차되어 있다. 주목되는 점은 보통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곳에 정조가 1792년과 1793년에 내린 세 편의 綸音이 있다는 점이다. 碑銘은 1794년에 세운 신도비의 비명으로 正祖가 직접 지은 것이다. 卷首에는 敎諭, 賜祭文, 圖說, 世譜, 年表가 있다. 권1~4는 詩, 雜著, 狀啓이다. 권5~8은 亂中日記인데, 이 전서 가운데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권9~14는 附錄으로 내용은 紀實인데, 중국과 우리나라 사적에서 저자 관계 기록을 뽑아 모은 것이다. 맨 끝에 문집의 간행에 관한 尹行恁의 跋文이 별도의 항목은 아니지만 첨부되어 있다. 이 또한 다른 문집들과는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이충무공전서』의 의미는 왕명을 받고 국가적인 사업으로 완성한 만큼 조선시대 출판문화에 있어서 하나의 표본이 되는 典籍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순신 개인의 傳記 자료로서 충분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사 연구에서도 빠질 수 없는 귀중한 1차적 문헌이다. 그리고 龜船과 같은 제도의 원형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소중한 전거가 되는 책이다.

임진왜란 시기 창녕 지역의 대응과 후대의 기억
(한국사상사학 46, 2014.04)
임진왜란 시기에 창녕 지역은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진격로와 운송로였으므로 침입과 약탈을 일찍부터 당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창녕 지역의 재지사족(在地士族)과 토성(土姓)들은 전쟁 초기부터 의병을 조직·활동했으며,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은 재지사족을 규합하여 의병운동을 지원했다. 이런 모습은 창녕 지역 의병운동의 한 특징이다.
임진왜란 개전기에 있었던 창녕과 영산전투는 경상우도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인근 지역의 의병들의 지원, 창녕과 영산 지역 의병들의 참여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창녕에서는 성씨(成氏)와 조씨(曺氏), 영산에서는 신씨(辛氏) 가문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의병을 규합하여 곽재우의 의병과 연합해 싸웠다. 지역의 지리에 밝은 의병들은 박진, 박곡 등에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다. 정유재란 시기에는 청야책(淸野策)에 따라 인근 고을 민을 동원하여 화왕산성을 쌓아 대비했는데, 농성전(籠城戰)으로 큰 전투 없이 수성(守城)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시기에 창녕 지역에서의 피난과 포로의 모습은 전쟁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주목된다. 일본군에 적극적으로 부역(附逆)한 영산인 공휘겸(孔撝謙)이 있었다. 포로가 된 이진영(李眞榮)은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 군에 끌려가 일본의 와가야마(和歌山)에서 살았다. 또 영산(靈山)에서 포로가 되어 인신매매를 당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피난의 경우 영산의 이석경(李碩慶)은 영산이 요충지에 위치하므로 난을 면할 수 없는 곳이라고 여겨 거창으로 피난했다가 친구 정구(鄭逑)가 부사로 있던 강릉(江陵)으로 들어가 지내다가 1596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명(明)의 군사가 왕래하여 마을이 소란하자 현풍현 가태산(嘉泰山)에 셋집을 얻어 살았다. 1597년에는 곽재우와 군사 일을 의논하다 아버지의 상을 당한 후 다시 관동(關東)으로 갔다. 1599년 봄에 고향으로 돌아와 냉천정(冷泉亭) 아래로 이주하였다. 한편 창녕으로 피난 온 경우는 양산의 정승우(鄭承雨)가 일본군에 잡혀서 히젠(肥前)으로 팔려갔다가 돌아와 어머니를 모시고 영산현에 와서 살았다.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에 대한 평가와 기억의 재생을 국가 유지에 이용하였다. 창녕에서는 많은 인물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올랐으며, 열녀에 선정되어 정문(旌門)을 받은 여인들이 있었다. 숙종 연간에는 임진왜란 때 활동한 인물을 배향하기 위해서 연암서원(燕巖書院)과 물계서원(勿溪書院)이 건립되었다. 정유재란 시기에 있었던 화왕산성의 수성은 조선후기 경상도의 남인에게는 이념적 구심점이 되었으므로 영조 연간에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이 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창녕 지역의 인사로 명단이 올라 있는 인물들은 화왕산성과 가까운 지역이었기 때문에 실제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활약한 인물들이었다. 한편 창녕 지역의 열녀수는 영산 1건, 창녕 9건으로 영산보다 창녕 지역에서 많았다.


麗․宋 시기의 海上航路의 형성과 활용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1, 2014.10)

麗․宋 시기는 동아시아교역권이 성립되는 시기였으며, 松商의 활동이 활발한 시기였다. 麗․宋 시기의 해상항로는 황해횡단해상항로와 남방해상항로 외에도 제주도경유남방해상항로가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제주도는 여․송의 교류뿐만 아니라 日․宋의 교류에서도 중요한 위치였다. 제주도는 食水의 공급처, 항로의 중간 경유지로서만이 아니라 고려가 제주도를 거쳐서 남송으로 가는 남방해상항로도 기능했다. 특히 私貿易이나 밀무역, 비상시의 해상항로로서 주목되는 항로였다.
麗․宋 시기의 해상항로는 北宋과 南宋 시기의 정치․외교적인 상황에 따라서 해상항로가 바뀌었다. 그렇지만 국가적인 차원의 公貿易은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여 항로가 변화되어 운영되었지만, 상인과 私貿易에서는 필요에 따라서 기존에 사용하던 항로를 계속 사용했다. 麗․宋 시기의 해상항로는 동아시아교역권의 성립과정에서 황해황단해상항로보다는 남방해상항로가 상인들에 의해서 많이 활용되었다. 그것은 宋商이나 고려 상인들이 사무역의 주요 해상항로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제주도경유남방해상항로도 주요한 해상항로로서 기능을 하면서 고려 상인들에 의해서 활용되었다.

조선후기에 해항도시 부산에서의 문화교섭 양상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4, 2016.04.30)

조선후기에 해항도시 부산에 있었던 초량왜관은 조선 내에 존재한 유일한 일본인 거주공간이자, 동북아시아 최대의 외국인 거주공간이었다. 때문에 500명 내외의 일본인이 상시 거주했던 초량왜관은 대표적인 문화 접촉지대였던 해항도시 속의 경계지대였다. 이에 초량왜관에서는 조선과 일본은 문화교류와 접촉이 제한적인 각종의 조처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조선후기에 초량왜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문화교류와 접촉은 양국인의 접촉 과정에서 나타났는데, 정상적인 경우와 불법적인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일반인의 경우 朝市 참여, 왜관 작업 참여, 密貿易, 欄出, 交姦 등을 통해서 일본인과 접촉하면서 다양한 일본 문화를 접촉하고 수용해 나갔다. 그리고 초량왜관에서의 문화접변과 혼종화는 이국문화의 수용 단계 이후 지역사회를 거쳐서 전국으로 전파되어 나갈 수 있었다. 초량왜관에서 문화교류와 접촉을 통한 문화접변과 혼종화 양상은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는 불법, 탈법, 범법의 행위였지만, 초량왜관과 주변의 공간에서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방법으로 지속되었다. 특히 음식문화와 생활문화는 조선과 일본에 많은 영향과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때문에 초량왜관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각자의 문화를 전달하고 수용하여 문화접변이 진행되었던 동북아시아 최대의 경계지대이자, 문화 혼종화가 진행된 상생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漂人領來謄錄 속의 濟州島 漂流民과 海域
(탐라문화 51, 2016.02.28)

17~18세기 중반에도 제주도는 지속적으로 표류민이 발생한 지역으로 해역의 변화상을 설명해 주는 좋은 사례이다. 조선후기의 자료 漂人領來謄錄에는 일본으로 표류했던 제주도인의 표류사례 30건이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의 표류민은 바람과 해류의 영향으로 추자도와 제주 해역에서 표류당하여 일본의 九州의 肥前州, 筑前州, 對馬島에 주로 표착하였다. 표착 후에 표류민은 長崎나 對馬島를 거쳐서 조선 동래부로 송환되었다가 제주로 돌아왔다. 조선후기가 되면 표류민의 송환은 국가 사이의 절차를 따랐는데, 이것은 자연적 현상에 인위적 체제가 작동하여 마무리되었음을 말해 준다. 제주도 표류민은 표착지에서 일본인과 만나면서 일본문화를 접하기도 했다.
17~18세기 중반에 제주도 표류민의 표류 시기는 해류와 바람의 영향으로 겨울철에 많이 발생하였으며, 제주도민이 표류선에 승선한 이유는 進上을 하러 가거나 진상을 마친 이후에 제주도로 귀환하는 과정이었다. 제주도 표류민의 표류선에는 진상 외에도 무역, 추쇄 등 다양한 이유로 同船한 경우가 많았다. 17~18세기 중반에 표류한 제주도 표류민의 공통적인 특징은 일본 현지에서의 조사과정에서 출신지를 전라도의 군현으로 위장하여 換稱한 점이다. 그것은 일본에 잘못 알려진 정보 때문이었는데, 異文化에 대한 인식이 바로잡히지 않은 모습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 제주도 해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표류민 문제는 일본뿐만 아니라 제주도 인근 국가에 표류한 사례까지 포함하여 검토함으로써 제주도 해역에서의 표류민 문제를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졌던 표류민 송환 문제를 동아시아 차원에서 규정함으로써 해역사 연구를 새롭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도 제주도는 주목되는 지역이다.

壬辰倭亂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
(지역과 역사 38호, 2016.04.30)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지금까지 행해진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측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현재까지 연구된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 성과를 전쟁사적 측면에서 크게 분류해 보면 전쟁의 명칭, 성격, 원인, 경과, 영향으로 나눌 수 있다.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일본에서는 구조적 측면에서 시대구분, 국가구조와 체제, 군량 운송과 피로인 송환체제 등에 연구가 진전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국난극복사적 측면에서 전쟁의 극복 문제, 의병과 주요 인물의 역할, 전쟁이 국내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한 연구가 많다. 그래서 양국의 연구 성과 가운데는 공통되는 부분도 있지만, 시각을 달리 하는 부분이 아직도 많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전쟁의 원인을 국내적인 시각에서 볼 것인가, 동북아시아 차원에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전쟁의 경과에서는 전쟁의 극복이라는 시각에서 의병의 역할을 중시할 것인가, 군수의 운송이 원활하지 못한 점을 중시할 것인가의 입장이 있다. 전쟁의 영향에서는 국내적 차원에서 볼 것인가, 국외적 시각에서 볼 것인가의 문제가 피로인 문제와 성격에서 남아 있다. 전쟁의 성격에서는 왜란으로 볼 것인가, 전쟁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 나라의 시각을 공유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임진왜란 연구에 있어서의 올바른 방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임진왜란을 동아시아의 시각에서 전쟁을 통해서 문화충돌과 접변이 발생하였으며, 해역을 통해 문화교섭이 진행된 시기였음을 인식해야 한다. 둘째, 임진왜란을 국가적 규모의 왜구인가, 아니면 국가 사이의 전쟁인가에 따라 객관적인 용어가 사용되어야 한다. 셋째, 각국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벗어나 전쟁의 원인, 경과, 영향 등을 객관적으로 연구하여야 하며, 전쟁이 남긴 교훈을 얻으려는 관점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넷째,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전쟁 당사국의 자료를 활용해 비교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의 사료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굴하고 객관화시켜 이용해야 한다.


이지항 표주록 속의 표류민과 해역 세계
(해항도시문화교섭학, 2017.04.30)

이지항의 『표주록』은 1696년(영조 32) 4월 13일 이지항이 강원도 원주에 가기 위해서 부산에서 寧海로 가던 중, 破船되어 일본의 蝦夷地까지 표류했다가 돌아온 약 11개월의 체험을 적은 기록이다. 저자 李志恒은 武官이었지만, 일본에서 지은 詩와 일기로 볼 때 학문도 상당하였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는 표류에서 귀환까지의 과정을 公述 과정을 통해서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으며, 표류 과정에서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지항 일행은 부산을 출항한 지 16일 되던 날 일본의 蝦夷地 서해안에 漂着하였다. 여기서 蝦夷族으로부터 음식을 얻어먹으며 연명하다가 연해를 따라서 내려와 松前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江戶와 大坂을 거쳐 對馬島에 도착하였다가 漂差倭와 함께 부산으로 귀항하였다. 조선시대에 일반적인 일본으로의 표류가 對馬島, 九州, 琉球였던 데 비하면, 이지항이 표류한 해역은 특별한 사례이다. 때문에 『『표주록』』에는 異文化의 체험이 많아서 표류민의 체험과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좋은 예가 된다. 무엇보다도 李志恒 일행이 松前에 있을 때, 그곳의 太守 등과 불교·神·유교에 관해 나눈 이야기와 耶蘇敎 포교에 관하여 筆談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지항은 표착한 일본의 풍속과 문명에 대해서 보고 느낀 바를 우호적인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는데, 일본에 대한 전통적인 華夷觀이 표출되어 있지 않다. 특히 蝦夷에서 蝦夷族과의 물물교환, 筆談과 詩書를 통한 松前人들과의 의사소통 등은 일본 동북쪽 지역과 조선의 교류라는 측면에서도 주목해야 할 사례이다.
조선후기에 동북아시아의 해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표류민 문제는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많이 발생하였는데, 특히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표류 문제를 통해서 지리적 해역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졌던 조선과 일본 사이의 표류민 송환 문제를 동북아시아 차원에서 규정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해역사를 새롭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이지항의 『표주록』은 중요한 표류민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의 『표주록』은 조선인으로서 최초의 蝦夷地 방문자가 남긴 체험적 기록이라는 점, 또 그 일행의 다양한 문화교류 활동을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주제어 : 동북아시아, 海域, 李志恒, 『漂舟錄』, 표류민, 蝦夷國


표인영래등록 속의 경상도 표류민과 해역
(역사와 경계 103호, 2017.06.30)

17~18세기 중반에 경상도 연안에서 지속적으로 표류민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동북아시아 해역 세계를
설명해 주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조선후기의 자료

남명 조식의 치국론과 의미(2018.03.30)
남명학연구원에서 발간하는 남명학 23집에 남명 조식의 치국론과 의미를 게재함.

Globalization of Sea Area of Northeastern Asia in 14-16th Centuries : Focusing on the Japanese Pirates(2018.03.16)
일본 나가사키대학 다문화사회학부에서 발간하는 다문화사회연구 2018년 4호에 Globalization of Sea Area of Northeastern Asia in 14-16th Centuries : Focusing on the Japanese Pirates를 개재함.

임진왜란 시기 일옹 최희량의 활동과 기억(2017.12.31)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이순신연구논총 28호에 임진왜란 시기 일옹 최희량의 활동과 기억을 게재함.

임진왜란기 양무공 김태허의 활동과 의미(2018.05.31)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한국문화 67집에 임진왜란기 양무공 김태허의 활동과 의미를
게재함.


저서 및 번역서내용보기
문화교섭으로 본 임진왜란(2014.04.30)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은 필요악과 같은 존재였다. 전쟁은 엄청난 파괴를 초래했지만, 동시에 문화교섭의 기회를 제공했다. 양면성을 지닌 문화는 문화교섭을 통해 문화변동이 일어나며, 혼종의 문화가 새롭게 탄생한다. 문화교섭의 특징은 지속성, 상호 교류성, 혼종성이다. 한편 인류의 역사는 대륙과 해양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꾸준히 서로 다른 문화를 공유해 왔다. 임진왜란은 해역 세력 대 육역 세력의 대립이었으며, 해역을 통한 문화교섭이 여러 측면에서 진행된 시기였다.
이 책은 문화교섭의 시각에서 조선시대의 조일 관계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전쟁의 원인․경과․결과․영향 및 전쟁의 극복을 다루는 전쟁사․의병사의 시각, 조선시대 조일 사이의 대외 관계사의 시각에서 주로 연구되었다. 하지만 조선전기에도 조일 사이에는 문화교섭이 지속되었는데, 대장경, 범종, 불사의 조연 요청이 대표적이다. 때문에 임진왜란은 일본의 조선문화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으며, 임진왜란을 문화약탈전쟁이나 도자기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아울러 임진왜란의 배경에는 15세기 후반의 대항해시대의 개막이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은 16세기 최대의 국제전쟁으로 조일 두 나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해양을 건너서 와서 일으킨 전쟁이었다. 전쟁으로 많은 문화충돌도 있었지만, 문화교섭이 촉진되기도 했다. 다만 일본이 조선문화를 약탈하는 과정에서 부작용도 상당히 많았다. 그렇지만 임진왜란을 통해서 서양문화와 동양문화의 교섭, 조선과 일본의 문화교섭이 진행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임진왜란을 통한 문화교섭은 크게 보면 전쟁, 개인, 문물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전쟁을 통한 문화교섭이다. 16세기 후반에 동아시아에서 사회변화가 일어날 시점에, 대항해시대의 개막으로 서양문화가 동양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서양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문화교섭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오랫동안 조일 사이는 문화교섭을 진행해 왔으며, 특히 조선전기에 일본은 조선문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해 왔다. 하지만 조선은 국내사정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시기가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발생한 임진왜란은 일본에게는 문화 약탈의 좋은 기회였다. 문화교섭은 상호적이기 때문에 비록 많은 조선문화가 일본으로 넘어갔지만, 일본문화도 조선으로 전파되어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고추와 두부를 통해서 문화교섭이 조일에 전쟁 이후에까지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으며, 전쟁으로 일본에 전파된 조선문화는 일본 근세사회의 성립에 직접적으로 크게 기여하였다.
다음으로 사람을 통한 문화교섭이다. 개인은 문화교섭의 중요한 주체이다. 전쟁으로 조선에서 일본으로 잡혀간 5~10만 명의 포로들은 곳곳에 조선문화를 전하였으며, 전쟁 이후에 일부 쇄환되어 돌아오기도 했지만 일본에 정착해 생활하였다. 현재까지도 큐슈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조선인 거주촌이 남아 있으며, 임진왜란과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문화재들이 남아 있다. 역으로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화한 항왜는 조선문화에 감동받아 귀화하기도 했지만, 조선의 적극적인 항왜 유치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항왜는 조선에 정착하여 조선인화 하였으며, 일본문화를 조선에 전파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야가인데, 달성군의 우록동에 후손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문물을 통한 문화교섭이다. 문물은 문화의 결정체이므로 문화교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임진왜란 중에 남해안에 쌓은 왜성은 두 나라의 문화가 접촉․혼종하는 공간이었으며,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왜성은 축성기법에서 조선 성곽과 차별되는데, 전쟁 이후에는 조선 성곽에 왜성의 축성법이 이용되기도 했다. 왜성은 전쟁 초기에는 직접적인 전투가 행해진 갈등의 공간이었지만, 일본군의 장기주둔으로 두 나라의 민들이 접촉하는 문화교섭의 현장이었다. 반면에 임진왜란의 전쟁 흐름을 바꾸어 놓은 조총은 일본이 서양문화를 수용하여 전쟁에서 효과를 본 사례이다. 조총의 등장은 전술적으로 기병전이 보병전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조선은 항왜를 통해 조총의 제조 기법을 수용했다. 조총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제도의 근간을 바뀌게 할 정도로 큰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부산의 재발견(2014.05.30)부산의 재발견이라는 책자 가운데 한류의 출발지, 부산이라는 부분이다. 조선시대에 통신사의 파견과 귀환의 현장이 부산이었다. 부산에는 영가대 등 통신사 관련 유적지가 남아 있으며, 통신사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와 재배에 성공한 곳이 절영도였다. 이런 차원에서 조선시대에 일본과의 관계에서 부산의 중요성을 살펴보았다.

The Formation and Utilization of Maritime Routes during the Koryo and Song Dynasties(2015.05.31)The Maritime Silk and Road Seaport Cities라는 책에서 고려와 송나라 시기의 헤상항로와 활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문무를 갖춘 양반의 나라(2015.10.15)조선왕조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큰 전쟁을 거치고도 유지되어던 요인을 양반사회의 작동에서 찾고자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에서 조선의 사대부 시리즈로 출간하였다.

수야곡에 흐르는 충절의 마음(2015.12.31)한국국학진흥원에서 발간한 수야곡에 흐르는 충절의 마음에 임진왜란 시기 청도 밀성박씨 14의사의 의병활동이라는 논문을 게재함.

연해방어의 긴요한 마을, 기장(2016.11.01)
2016년 정관박물관 특별기획전 연안방어의 긴요한 고을, 기장이라는 도록에 사료로 본 기장 지역의 관방유적을 게재함

대구지역임진란사(2017.06.10)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가 펴낸 대구지역 임진란사에 임진왜란 시기 대구권역의 의병운동과 변화를 실음.

일기를 통해 본 양반들의 일상세계(2017.12.27)
한국국학진흥원에서 펴낸, 일기를 통해 본 양반들의 일상세계-17세기 매원일기를 중심으로-에, 광산김씨 예안파의 병자호란 대응 양상 부분을 지음.

단둥, 단절과 이음의 해항도시(2018.01.10)
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연구소에서 해항도시문화교섭학연구총서 15로 간행한 단둥, 단절과 이음의 해항도시에 전근대 국경도시 의주 지역의 교통로 변화와 의미를 게재함.

조선시대 해항도시 부산의 모습-군항과 해항-(2018.05.31)
조선시대부터 나라의 관문이 된 부산의 모습을 해항도시라는 시각에서 접근하여 분석한 조선시대 해항도시 부산의 모습-군항과 해항-을 해항도시문화교섭총서 20으로 간행함.

동아시아해역의 해항도시와 문화교섭 1~2(2018.05.31)
해항도시문화교섭학연구총서 18~19,동아시아해역의 해항도시와 문화교섭 1~2에 조선 후기 동아시아 해역의 표류민 송환체제를 실음.

경북지역 임진란사 1~3권(2018.06.25)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에서 간행한 경북지역 임진란사 1~3권(2018.06.25)에 임진란기 영천읍성 수복과 이후의 전투 상황, 임진란 시기 경주성 복성전투와 항쟁 활동, 임진란기 한강학파 임진란 지조자의 항왜활동에 대한 연구, 임진란기 청도지역 고성이씨 고문헌에 관한 연구를 게재함.


기타내용보기
해양실크로드와 해항도시(2014.09.22)
경상북도,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중국 광저우 중산대학교가 주관한 해양실크로드와 해항도시라는 주제로 중산대학교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서 여송시기의 해상항로와 활용이라는 주제로 발표함.

평화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전쟁(2014.10.14)
2014년 쉬즈메디병원과 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 주관의 함께하는 역사교실에서, 평화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임진왜란으로 문화교섭적인 측면에서 강의함.

한국사 과학 探(2015.01.15)
YTN SCIENCE에서 한국역사의 놀라운 재조명을 위해 기획한 한국사 과학 探이란 프로그램의 주제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흔적, 왜성에 출연하여 왜성의 문화교섭 공간으로서의 의미 등에 대해 설명함

조선에 쌓은 왜성, 기장죽성리왜성(2015.04.25)
경북대학교 인문사회연구원과 기장군이 주관하는 인문도시사업 가운데 타박타박 인문학 코너에 조선에 쌓은
왜성이라는 주제로 투고하여, 기장왜성을 통한 문화교섭 등에 대해서 기장신문에 게재함.

서평, 이종찬 저, 난학의 세계사(2015.04.15)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2호에 난학의 세계사에 대한 서평을 게재하였다.

해양문화콘텐츠 : 원류, 인간, 교류(2015.11.26)
2015 동아시아 해항도시 국제학술회의에서 17~18세기 제주도 표류민을 통해 본 해역-표인영래등록을
중심으로-를 발표함.

조엄 조내기 고구마 전래기념사업 학술용역 최종보고서(2015.10.28)
부산대 한국민족연구소에서 주관한 조엄 조내기 고구마 전래 학술용역 최종보고회에서 자문함.


서평, 최부 저, 표해록(2015.10.31)

최부가 지은 표해록에 대한 서평을 해항도시문화교섭학 13호에 게재함.

The 4th International Conference of the World Committee of Maritime Culture(2014.04.25-26)
The 4th International Conference of the World Committee of Maritime Culture(WCMCI)에서 Changes in the Busan Garrison Castle and Cultural Hybridity in the Choseon Dynasty를 발표함.

통영시립박물관 2016년 1학기 박물관대학(2016.06.16)
통영시립박물관 주최 박물관대학에서 임진왜란에서의 해양과 문화교섭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의하고, 국내의 대응력으로서 의병활동에 대해서 설명함

7th IMEHA International Congress(2016.06.27-07.01)
제7회 IMEHA에 참석하여 The Form and the Meaning of Cultural Exchange of Sea Port Cities of ‘the Korea-Japan Strait’ in the 16~17th Centuries를 발표함

절이도 해전과 조명연합수군 역할 평가 토론회(2016.08.19)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주최한 절이도(거금도)해전과 조명연합수군 역할 평가 토론회에서 토론의 사회를 봄

해양 역사문화유산사업 자문회의(2016.09.07)
국립해양박물관에서 개최한 해양역사 문화유산 조사 관련 자문회의에 참석하여 자문함.

2016 동아시아 해항도시 학술회의(2016.11.24-25)
인하대학교 개교6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해항도시 축적된 과거와 미래의 발굴, 학술회의에서 신의주 원산화교와 배화폭동에 대해 토론함.

2016년 정관박물관 초청강연회(2016.11.30)
정관박물관에서 특별기획전 <연안방어의 긴요한 고을, 기장>을 기념하여 개최한 초청강연회에서 문헌사료로 본 기장의 관방체제에 대해서 강연함

2016 Trans-Pacific International Conference(2016.12.09)
부경대학교 미래관에서 열린 2016 환태평양 국제학술대회에서 Chen Shangsheng(중국 산동대학교)의 On Piracy and International Anti-piracy Cooperation Mechanisms of Northeast Asia in late Fourteenth Century에 대해 토론함.
Chen Shangsheng

다대진성과 만나다(2017.03.06)
부산시 사하구청에서 다대진성의 역사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 사하구청 직원을 대상으로 강연함

이충무공전서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극복 양상(2017.04.26)
해군 진해기지사령부에서 해군 장병에게 이충무공전서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역할에 대해서 강연함

제7회 세계해양문화연구소협의회(WCMCI) 학술대회(2017.05.19-20)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제7회 WCMCI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Glocalization of Sea Area of Northeastern Asia in 14-16th Centuries : Focusing on the Japanese Pirates에 대해 발표함.

다대진성과 만나다 포럼(2017.05.26)
부산시 사하구청에서 주관한 임진왜란 첫 승지, 다대진성과 만나다 포럼에서 임진왜란 시기의 다대진성전투에
대해서 발표함.

다대진성 기획시리즈(2017.02.24~07.20)
부산시 사하구청의 구보, 내고장 사하에 다대진성 기획시리즈(다대진성의 발자취, 임진왜란 시기의 다대진성전투, 다대진성을 지킨 사람들, 다대진성의 운영, 다대진성의 구조와 건물, 다대진성의 가치와 복원)을 2017년 2월부터 7월까지 6회에 걸쳐서 연재함.

2017년 명청사학회 하계 연구토론회(2017.07)
부경대학교에서 열린 명청사학회와 부경대 해양인문학연구소가 주관한 대항해시대 동아시아 해역세계의 변화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근세 동아시아 해상에서 전개된 표류연구의 동향과 과제(김경옥)에 대하여 토론함

2017년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2017.10.10)
신라대학교 도서관이 주관한 2017년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자유학기제 연계형 프로그램, 바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징검다리라는 주제의 프로그램에서, 바다의 영웅과 민중의 이야기-임진왜란-에 대해서 강의함.

부산경남사학회 2017년도 동계 학술발표회(2017.12.08)
한국해양대학교에서 열린 부산경남사학회 2017년도 동계 학술발표회에서 15세기 말 남해안 지역 두무악의 발생과 사회경제적 배경에 대해서 토론함

영국함선 방문역사 고증 및 상징화사업 기본계획수립 용역 중간보고회(2018.01.31)
부산 남구청이 추진하여 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연구소가 수행한 영국함선 방문역사 고증 및 상징화사업 기본계획수립 중간보고회에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함

제8회 WCMCI 학술대회 발표(2018.03.30-31)
제8회 WCMCI 학술대회에서 A Maritime Conflict between Joseon and Japan in the 16th Century에 대해서 발표함.

2018 제13기 인제대학교 박물관대학(2018.04.19)
2018 제13기 인제대학교 박물관대학, 주제 세계문화유산 탐구(6); 일본의 세계유산-인문학으로 바라본 일본-한일교류의 역사(2)에서 일본 음식문화의 조선 유입 창구, 초량왜관에 대해서 강연함.

음식 인문학-초량왜관을 중심으로-(2018.06.22)
2018년 전국산업체영양사 워크숍(부산)에서 음식 인문학-초량왜관을 중심으로-를 강연함.

한중 군사관계사 학술세미나(2018.08.09)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주관한 국제정세와 전쟁으로 본 조선시대 한중군사관계사라는 국제학술세미나에서 해역사에서 본 동아시아 임진전쟁을 발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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