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연구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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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열 (HK교수/ 연구분야 : 일본 근대사상)

논문논문 초록 
근대일본작가의 上海체험(해항도시문화교섭학, 2010.4.30)
국제적 식민도시 상해는 근대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찾은 외국 도시 중 하나였다. 본 논문은 상해를 방문하고 기록한 몇몇 일본근대작가, 예를 들어 무라마츠 쇼후, 타니자키 쥰이치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타케다 타이쥰, 홋타 요시에 등의 작품 분석을 통해 양국 간의 문화교섭의 실상과 그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상해를 찾은 일본작가들은 중국이 처한 식민지적 정치 상황에 대해 의도적으로 발언을 삼가하고, 문화적 내지 개인적 유대관계를 통해 양국 간의 문제를 처리하려고 했다. 근대일본작가들의 상해 체험과 문화접촉에 보이는 이러한 경향은 국가적 사고의 극복이 이야기되고 있는 오늘날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오자키 호츠미(尾崎秀実)의 중국인식과 上海 경험(역사와 경계, 2010.6.30)
본 논문은 근대일본의 저명한 중국전문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오자키 호츠미의 중국인식과 상해 경험의 관련에 대해서 분석한 것이다. 오자키가 활동했던 1930년대의 상해는 중국의 식민지적 상황을 상징하는 대표적 식민도시임과 동시에 세계 각지로부터 모여든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오자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혁명의 현실을 일본 국내에 전하고 또 일본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기획하고 있었다. 논문에서는 오자키가 상해에서 개인적 관계를 맺었던 중국의 좌파 지식인들, 그리고 스메들리와 조르게와 같은 국제공산주의자들과의 만남 등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상해가 당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지로서 기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근대일본과 미크로네시아(동북아문화연구, 2011.3.31)
미크로네시아 제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간 지역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지금까지 주로 국제정치학이나 제국사적 연구의 대상이었던 근대일본과 미크로네시아 제도의 관계를 문화교섭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것이다. 주된 분석 대상은 식민정책학적 관점에서 위임통치령 미크로네시아를 연구한 야나이하라 타다오, 사적인 방문 체험을 여행기로 발표한 이시카와 타츠조, 그리고 남양청 관리로 부임한 뒤 자신의 미크로네시아 경험을 토대로 독자적 작품세계를 구축한 나카지마 아츠시 등이다. 이러한 지식인들의 발언 속에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항대립적 세계관, ‘야만’에 대한 동경과 근대적 사고,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 등이 드러나 있었다. 
지배와 향수(일어일문학, 2011.5.31)
대련은 20세기 동아시아의 역사를 체현하는 식민지 해항도시이다. 열강의 진출과 중국의 저항을 기본 축으로 전개된 대련의 역사에는 영국, 러시아, 일본, 소련 등이 등장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이러한 굴곡에 넘친 대련의 역사를 근현대 일본작가들의 대련 표상을 중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근현대 일본에서 대련을 방문하고 대련에 관해 기록하고 회상한 예는 다수 존재한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또 무엇을 보지 못했는가. 그들은 무엇을 기록하고 또 무엇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본 논문은 쿠니키다 돗포, 나츠메 소세키, 나카지마 아츠시, 이노우에 히사시, 키요오카 타카유키의 작품을 소재로 하여 근현대 일본작가들의 제국의식, 오리엔탈리즘, 내셔널리즘 등을 살펴보았다. 
현대일본의 대련(大連) 표상(일본연구 36, 2014.02)
현대일본에서는 대련에 대한 두 가지 이미지, 즉 근대도시와 식민도시의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다. 교차하는 대련 이미지는 각각 20세기에 만들어진 식민지도시 대련의 한 단면을 상징하고 있다. 대련은 영국,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의 지배를 차례로 받는 과정 속에서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는 동아시아의 대표적 식민지도시로 거듭났다. 본 논문은 현대 일본사회에서 발표된 몇몇 대련 관련 작품을 소재로 하여, 식민지도시 대련이 걸어온 질곡의 근대사와 민족 간 접촉과 갈등 속에서 탄생한 새로운 정체성의 가능성에 관해 살펴본 것이다.
재조일본인 2세의 식민지경험(한국민족문화 50, 2014.02)
재조일본인에 대한 연구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는 적어도 이주일본인들을 ‘침략의 첨병’으로만 바라보는 기존의 연구와는 관점을 달리하고 있다. 본고는 재조일본인들을 세대적으로 구분하여 주로 식민 2세들의 경험과 의식을 그들이 남긴 문학작품이나 체험기를 통해 살펴보는 일이다. 패전 이후 일본에서 식민 2세들에 의한 회상기와 체험담이 출현하기 시작하는 것은 1970년대 전후부터였다. 그것들을 살펴보면 패전 직후의 기아 상태와 곧이어 시작된 고도경제성장 속에 해소된 듯 했던 전후일본사회에 대한 식민 2세들의 위화감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식민 2세는 전후일본사회가 망각해온 식민지의 기억을 되살리는, 다시 말해 제국 일본과 현대 일본을 가교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본고가 식민 2세의 역사와 의식구조에 주목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가와카츠 헤이타(川勝平太)의 해양아시아사(해항도시문화교섭학 10, 2014.04)
논문의 목적은 현대일본의 역사학자 가와카츠 헤이타가 주장하는 아시아 근현대사를 비판적으로 재독하는 일이다. 그가 주장하는 해양아시아(maritime asia)의 역사는 일본의 근세와 근대의 연속성을, 다시 말해 근세 동아시아의 해상교역과 일본공업화의 내재적 관련성을 가장 체계적 그리고 입체적으로 제시한 역사이론이라 할 수 있다. 가와카츠의 이론은 유럽중심주의의 극복, 아시아를 내재적 시점에서 파악하려는 태도, 내셔널 히스토리의 상대화 등에 있어서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면서도 일본의 근세를 실체 이상으로 과도하게 포장하거나 근대 이후 일본자본주의가 수행한 아시아 지역으로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은폐하는 점 등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논문에서는 그의 이론을 면밀하게 재독함으로써 가와카츠가 주장하는 해양아시아사가 일본자본주의에 대한 적극적 평가와 1980년대 이후 아시아의 경제적 번영에 대한 인식론상의 전환을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적 이론이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했다.
‘아시아 교역권론’의 역사상( 한일관계사연구, 2014.08)
1980년대에 들어 아시아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했다. 1980년대에는 ⅰ)경제대국 일본이라는 현실과 아시아 경제의 약진, ⅱ)사회주의의 몰락, ⅲ)구미 자본주의의 사양 등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해석이나 서구 근대를 이념으로 하는 시민사회파 계열의 역사학은 후퇴해갔다. 상황 속에서 탄생한 ‘아시아 교역권론’은 ⅰ)동아시아역사를 국민경제사의 집합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ⅱ)국가 간 교섭이 아닌 해항도시 간의 횡적 네트워크를 통해 ⅲ)16세기 이후 일체화된 세계와의 관련성 속에서 동아시아 근세・근대의 독자성을 밝히고자 했다. ‘아시아 교역권’ 논의는 민족국가 패러다임 비판, 유럽중심주의의 극복과 같은 현대 역사학계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일본의 근대를 제국주의로부터 구출하여 그것이 아시아 경제발전에 가져온 적극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숨은 주제를 품고 있다. 이러한‘아시아 교역권론’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적하는 것이 본 논문의 주된 동기이다.
1960년대 일본의 국가 구상과 오키나와(일어일문학, 2014.11)
본 논문은 1960년대 일본의 국가 구상 논의에서 오키나와가 어떻게 동원되었는지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회고해보면 오키나와는 근세일본에 편입된 이래 근대국가 일본을 거쳐 현대일본에 이르기까지 줄곧 일본의 아이덴티티를 되묻는 장소로서 존재해왔다. 오키나와를 묻는 작업은 일본을 묻는 작업이기도 했던 것이다. 본고는 현대일본 사회에서 오키나와를 사상의 문제로 고민하고 방법화하는 데 성공한 두 명의 전후 지식인, 즉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와 다니가와 겐이치(谷川健一)를 통해 1960년대 일본의 국가 구상에서 오키나와가 어떻게 개입하고 어떠한 논의를 촉발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여기서 양인의 논의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의 사상이 당대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에 의한 수단적 오키나와론의 허구성을 고발할 뿐만 아니라 근대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와해, 전복시키기 위한 장소로서 오키나와를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운대 관광의 탄생(인문연구 72, 2014.12)
본고는 해운대가 관광지로 발견, 조성되는 과정을 탐색하는 것 을 목적으로 하며, 특히 개항기와 식민지시기에 주목하여 일본에 의한 공간 생산 및 공간 표상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해운대가 온천으로 개발되고 관광지로 조성되는 과정에는 해운대 자연에 대한 식민자의 낭만주의적인 시선이 투사되어 있었고, 이러한 시선을 통해 해운대는 보양 여행(건강 증진)과 가족 여행(가족의 발견)의 메카로 조성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부산의 원도심 공간에서 보여준 근대적 심벌들, 예컨대 영도대교나 부산부청(釜山府廳) 등과는 구별되는 근대 휴양 시설을 해운대에 조성하여 또 다른 층위의 근대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는 원도심과 해운대에서 층위가 다른 두 겹의 근대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하에서는 해운대 관광의 시작과 전개를 검토하고 나아가 해운대가 부산에서 어떠한 근대적 공간으로 서사되고 재현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식민도시 부산의 로컬리티를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살피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 경제사’와 근대일본: 제국과 공업화(역사학보 232, 2016.12)1980년대에 들어 아시아경제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했다. 1980년대는 ⅰ)경제대국 일본과 아시아 경제의 약진, ⅱ)사회주의의 몰락, ⅲ)구미 자본주의의 사양 등이 동시 진행 중이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해석이나 서구의 근대를 이념으로 하는 시민사회파 계열의 역사학은 후퇴해갔다. 아시아 경제에 대한 새로운 연구 조류가 탄생한 것은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였다. 그 대표적인 연구자들은 하마시타 타케시(浜下武志), 스기하라 카오루(杉原薫), 카와카츠 헤이타(川勝平太) 등이었다. 그들의 연구는 논자에 따라 대상, 내용, 시기가 제각기 달랐지만 ‘아시아 경제사’는 ⅰ)아시아 경제를 국민경제사의 집합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ⅱ)국가 간 교섭이 아닌 환해 도시 간의 횡적 네트워크를 통해, ⅲ)16세기 이후 일체화된 세계와의 관련성 속에서 동아시아 근세・근대의 독자성을 밝히고자 하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었다.
‘아시아 경제사’는 오늘날 일본 학계에서 견고한 한 축을 형성했다. 그것이 민족국가 패러다임 비판, 유럽중심주의의 극복과 같은 현대 역사학계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미 학계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일정한 발언권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시아 경제사’는 그것을 단순히 학문적 동기에서 비롯하는 경제사 연구로 보기 어려운 측면을 갖고 있다. 일본의 근대를 제국주의의 역사로부터 구출하여 아시아 경제발전에 대한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숨은 주제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경제사’가 제시하는 근면혁명→산업혁명→재건과 부흥으로 이어지는 역사상으로부터는 제국주의, 자본주의, 국가, 지배 등에 대한 고찰을 찾아볼 수 없다. 근대일본의 석세스 스토리를 강조하는 ‘아시아 경제사’에서 근대 비판의 논리를 찾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시아 경제사’는 일본공업화에 대한 적극적 평가와 1980년대 이후 아시아의 경제적 번영에 대한 인식론상의 전환을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적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시기 신의주의 일본 제지업(해항도시문화교섭학 17, 2017.10)신의주는 20세기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열강의 각축과 일본 대륙정책의 결과로서 탄생한 식민지도시였다. 신의주가 열강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압록강 유역 산림자원 때문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산림자원을 관리하는 관청을 신의주에 설치하고 중국 동북 지방으로 연결되는 철도망을 구축했다. 모래벌판에 불과했던 신의주가 번영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이후 신의주는 국경무역의 거점 도시로서 발전해 1929년에는 조선 전체 항구 가운데 무역액에서 제1위의 항구가 되었다. 왕자제지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신의주에 진출하여 펄프 생산 공장을 설립했다. 신의주를 선택한 이유는 제지업의 원료가 되는 원목을 쉽게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자제지의 조선 사업은 처음부터 식민 당국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 이는 회사와 역대 조선 총독과의 깊은 유착관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압록강 유역에서 벌채된 원목의 절반을 독점한 왕자제지는 이후 사업을 확대해갔고, 그 과정에서 회사의 경영자인 후지와라 긴지로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 전반에 관여하는 중요한 경제 주체가 되었다. 반면 신의주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산업화의 이익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채 존재하고 있었다. 저임금과 일상생활에서의 차별은 신의주의 또 다른 얼굴이자 식민지 산업화의 민낯이었다. 왕자제지의 역사는 일본 제지업의 역사이고 그것은 그대로 일본자본주의의 역사이기도 하다. 만약 여기에 식민 권력과의 유착과 식민지적 저임금 위에서 전개된 조선 사업의 역사를 더한다면 왕자제지의 역사는 일본제국주의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朝鮮植民二世の意識構造(21世紀東アジア社会学 9, 2018.03)
다이쇼 데모크라시기 의회중심주의의  역사적 전개(역사와 경계 110, 2019.03)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자유민권운동, 전후민주주의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운동의 하나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천황대권주의자들과의 대항관계 속에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민본주의는 심부에 민주주의를 내포하면서도 보수주의자들과의 정치적 마찰을 회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주권논쟁을 거론하지 않고 헌정의 실질적 민주화를 추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이 주장한 정치적 자유는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 없는 수단적인 가치에 머물렀다. 만약 민본주의자들의 이러한 점을 동시대의 보수층을 설득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 내지 전략이라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그들에 대해 지나치게 호의적인 견해이다. 민본주의자들이 주장한 정치적 자유의 확대는 국가 발전을 위한 수단 혹은 방법으로서 제안된 것이었다. 의회정치도 거국일치적인 국론 통일이나 진정한 국가 발전의 수단으로서 의미를 가질 뿐이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갖고 있던 문제점은 1930년대 이후의 비상시 상황 아래서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의회중심주의와 국가주의가 밀월관계에 있었던 1910년대와 비교하여 1930년대의 의회제를 둘러싼 객관적인 상황은 전혀 달랐다. 상황 속에서 의회주의자들은 통합 기능만이 돌출된 기형적인 데모크라시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통치술로서의 입헌정치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기 이래 의회중심주의의 내부에 잠재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국민통합론으로서의 데모크라시 정치, 의회제도의 형식합리성에 대한 불감증, 여기에 정당의 무능과 비상시 상황이 더해져 일본의 의회는 모든 정신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단순한 껍데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1930년대 의회제의 몰락은 다이쇼 데모크라시기의 의회중심주의자들을 포함한 총체적 자괴 현상이었다.
글로벌경제사 속의 일본공업화론: 비판적 평가(해항도시문화교섭학 20, 2019.04)근면혁명 논의를 계기로 시작되어 스기하라 가오루의 ‘노동집약형 공업화’론으로 이어지는 수정주의적 일본경제사 연구는 근대세계체제에 대한 아시아의 독자성을 강조하며 유럽 중심적 근대세계관의 해체를 시도하는 장점을 가졌다. 이 연구가 가진 이러한 장점이야말로 이들의 연구 성과가 케네스 포메란츠나 조반니 아리기 같은 글로벌 경제사 학자들의 연구에 적극적으로 수용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런 시각은 아시아 근대사에서 제국주의의 계기를 극도로 경시하고 일본공업화를 아시아 경제 성장의 “엔진”으로 평가하는 보수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특히 스기하라가 공업화 과정의 또 다른 경로이자 서구의 자본집약형 공업화에 대한 대안으로까지 격상시켜 제기하는 노동집약형 공업화론은 일본 제국주의를 ‘자원 제국주의’로 성격 부여하여 제국 일본의 침략 행위를 정당화할 위험성을 안고 있고 일본이 주변 여러 나라에 끼친 피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근거를 제공해 줄 가능성을 갖고 있다. 아울러 그의 공업화론은 (서구와 달리) ‘근면’이라는 실체가 불확실한 개념을 활용하여 공업화를 규정함으로써, 동아시아의 공업화 과정에서 문제시되었던 저임금․장시간 노동의 착취 체계를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결국 스기하라 가오루의 ‘노동집약형 공업화’론은 글로벌 경제사 전체에서 가지는 긍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지역 내 경제의 사적 전개를 부당하게 미화하고 왜곡해서 해석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상하이의 憂鬱: 1930년대 해항도시 상하이의 삶과 기억- 김광주와 요코미쓰 리이치를 중심으로(인문사회과학연구 20-2, 2019.05)1920년대 30년대 식민과 제국,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내셔널리즘과 코즈모폴리터니즘과 같은 중층적 상황을 존재적 조건으로 안고 있던 상하이에서 생활했던 식민지 조선출신의 작가 김광주의 삶과 짧은 기간 상하이를 방문했던 제국 일본의 작가 요코미쓰 리이치의 기억 속에서 우리는 ‘憂鬱’이라는 공동의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라는 조건 하에서 식민지민으로 살아가는 조선인들에게 우울은 그 층위야 어떻든 간에 전반적인 심리적 징후로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자유민권운동이나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를 경험했던 일본의 지식인들 역시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에 관한 논의의 과정을 통해 민족과 국가의 논리에 가로막혀 우울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울이라는 감성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폭력성과 그에 대한 자신의 무력감의 표현으로 나타나거나 혹은 이러한 세계를 돌파할 수 있는 힘으로 인식될 수 있다. 민족과 국가, 혹은 조국이라는 논리에 막혀 적극적인 혁신세력으로 변신할 수 없었던 요코미쓰 리이치나 식민지민이라는 천형을 받은 김광주가 상하이에서 갖게 된 우울은 기실 그들이조국과 대립되는 가치의 소유자임을 반증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트라우마로서의 조국에 대한 사랑을 보유하는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작가 김광주와 제국 일본의 작가 요코미쓰 리이치가 가졌던 우울감은 분명한 차별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본문에서는 김광주와 요코미쓰의 작품들을 통해 그들이 상하이라는 해항도시에서갖게 된 우울감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근대 ‘만주’ 무역과 동북아시아(인문사회21 10-5, 2019.10)본고는 근대 ‘만주’와 동북아시아 각 권역 간의 무역을 분석하여 ‘만주’와 동북아시아의 관계를 고찰한 것이다. ‘만주’ 각지에서 해관무역이 진행되었던 1907년부터 1931년까지 잉커우・다롄・단둥・하얼빈의 해관자료를 이용, 무역액 및 내역을 분석하여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근대 ‘만주’ 무역은 동북아시아 국제관계의 변화와 연동되어 있었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만주’에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한 일본은 다롄과 안둥의 무역을 통해 ‘만주’를 자국의 원료공급지이자 상품시장으로 자리매김하는 동시에, 잉커우와 하얼빈의 무역 성장을 저지함으로써 중국과 러시아 세력을 견제했다. 요컨대 근대 ‘만주’ 무역은 ‘만주’와 동북아시아 각 권역의 경제를 잇는 실질이자, 일본 제국주의 세력 확장의 경제적 기반이었다. 보다 종합적인 고찰을 위하여 ‘만주’ 내 기타 무역항들의 무역상황, 해관 설치 전후의 무역추이, 비공식 무역에 관한 추가 분석이 요구된다.
왜구론의 행방 : ‘바다의 역사’와 일본 중세 대외관계사(해항도시문화교섭학 21, 2019.10)1945년 이후 일본의 왜구 연구는 몇 차례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먼저 중국사 연구자와 일본 대외관계사 연구자에 의해 ‘16-17세기 왜구 중국인 주체설’과 삼도 해민설이 제기되었다. 이후 논의는 확대되어 14-15세기 왜구에 대해서도 일본인 주체설을 부정하고 일본인과 고려인·조선인 연합설이 출현했다. 왜구가 동원한 대규모 병력의 현실적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다민족 연합설을 주창했던 것이다. 연합설의 근거로 제시된 것은 한반도 출신의 천민 계급이나 농민층이 왜구로 위장해 침구한 사례였는데, 일본의 왜구 연구는 그 요인을 고려왕조의 정치적 무능에서 찾았다. 그 뒤 왜구 다민족 연합설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경계인설이 출현했다. 그것에 의하면 ‘왜’는 결코 ‘일본’과 등치할 수 있는 말이 아니며, 당시 동아시아해역은 국가적, 민족적 귀속이 애매한 경계인들의 활동 무대였다.
최근 한국에도 널리 소개되고 있는 일본 학계의 ‘바다의 역사’나 동아시아 해역사 연구의 왜구 서술은 일본 대외관계사 연구 성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바다의 역사’는 본래 육지 중심의 역사관을 바로잡기 위해 제출된 방법론이었다. 바다에 주목하는 이유는 종래의 역사학에 보이는 국가중심사관을 반성하고 국경과 민족의 틀을 넘어 새로운 역사를 지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 학계의 동아시아 해역사 연구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비판・극복하려는 국가에 의해 다시 포섭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행 역사교과서에 묘사된 왜구에서 더 이상 침략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거나, 왜구를 아시아 역내 시장의 ‘교역자’로 평가하는 것 등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근현대 일본에서 왜구 이미지가 걸어온 발자취는 그대로 일본 국가의 대외정책과 궤를 같이해 왔다. 이러한 점에서 왜구는 역사를 거울삼을 때 여전히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는 현재진행형의 주제이다.
한국 선원의 원양 항해와 글로벌 네트워크의 형성(해항도시문화교섭학 21, 2019.10)한국은 식민지 지배와 전쟁으로 말미암아 피폐화 된 이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놀라운 경제성장력을 달성했다. 이 논문은 ‘수출역군’으로 명명되지만 잘 알려지지는 않은, 그리고 원양으로 나갔던 선원에 관한 것이다. 세 명의 구술사에 기반하여 1970-90년대 한국 선원들의 대양의 항해는 글로벌 교역에 참가한 화물 운송자로서 역할을 수행한 것임을 밝혔다. 특히 원양의 항해는 여러 국가의 경계를 넘게 되므로 다국가적, 국제적인 교역망 속에서 이뤄지는 사회적 행위이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 선원에 대한 연구들은 선박 중심의 관점이 강했고 선원의 역할과 활동에 대해서는 미진하였다.
이 글은 선원 중심의 접근이 중요함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그 예로써 해외로 나가 글로벌 무역에 종사한 한국 선원들의 대양 항해로부터 얻어진 경제적 성과가 국내 경제의 초석이 되었음을 주장하였고, 이를 해운종자론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들은 국내 산업 육성을 위한 원료의 수송과 상품의 해외 운송을 담당한 국내 산업인력이었던 것만이 아니라 글로벌 경제의 운항자로서 참여하고 있었다. 구술자들은 석탄과 철광석, 황, 모래, 목재 외 다양한 화물들을 전지구를 횡단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형성된 글로벌 항해 네트워크의 구체적 실태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세계적 해운사의 고용된 노동자로서 일을 하였고 한국에서 숙련된 인력으로 해외 송출되었다. 그들 자신이 글로벌 경제의 운행에 운항자로서 수출된 인력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세계의 대양을 가로지른 글로벌 항해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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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제국(선인출판사, 2011.6.1)동아시아의 근대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곳에는 어떠한 지역질서가 구상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어떠한 질서가 실제로 구축되었는가. 또 그것은 동아시아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는가. 본서는 이러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영국의 아시아 전략을 축으로 설명하고 있다. 동시에 본서는 영국의 아시아 정책이 당시 새롭게 생겨나기 시작한 동남아시아 신생 국가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또 그것이 오늘날의 동남아시아 국민국가들이 처한 정치적 상황과 어떤 내재적 관련성이 있는가에 대해서도 매우 설득력 있게 서술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근대를 아편전쟁 정도로만 생각하는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서도 동남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동인도회사와 아시아의 바다』(선인, 2012년 6월 30일)

새로운 세계사(선인, 2014년12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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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세계해양문화연구소협의회(WCMCI) 국제학술대회(2017.05.19-20)일시: 2017.05.19-20 / 장소: 중국 상하이사회과학원 분부
발표제목: Theory of Japanese Industrialization in the Global Economic History: A Critical Assess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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