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연구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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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낙민 (HK교수/ 연구분야 : 중국 고전문학)


논문
논문초록
日帝 强占期 上海 移住 韓國人의 삶과 기억(해항도시문화교섭학, 2010.04)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이 자유를 찾아 상해로 이주하게 된 원인은 상해가 조계지였다는 역사적 배경 및 교통의 편리성이라는 지리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상해는 50여 개 국가의 사람과 문화가 교류하고 공존할 수 있는 열린 공간, 공생의 공간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상해가 이주민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해항도시 상해가 갖는 경제적 우월성, 정치적 개방성, 문화적 포용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주는 상해라는 공간에 다문화가 공생할 수 있는 인적, 공간적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상해라는 공생과 혼효의 공간에 이주한 한국인들은 서구인들이 세워놓은 마천루와 백화점 극장 등 건축군들을 통해 서양의 물질문명과 움직이고 있는 서구 제국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각 대륙에서 이주해 온 각 이주민을 만나고, 그 속에서 새로운 학문과 전 세계 인민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사상과 아나키즘의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東方의 巴黎”, 근대 해항도시 上海의 도시 이미지(역사와 경계, 2010.06)
본 논문에서는 근대 중국역사의 축소판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해를 중국인들은 왜 ‘동방의 파리’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는가 하는 이유를 찾고자 했다. 아시아 해항도시 네트워크의 중심지인 상해가 파리와 같은 근대성을 대표하는 중국의 대도시로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공공조계와 프랑스조계라는 특수한 도시공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동방의 파리’라는 이미지는 프랑스조계가 창출해 낸 독자적인 공간특성과 프랑스문화를 추종하는 지식인-도시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본 논문에서는 경계-양경빈, 통로-하비루, 그리고 랜드마크-성 이그나티우스성당을 중심으로 한 “徐家匯敎堂區”를 통해 프랑스조계의 건설과정과 이미지형성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도시이미지를 구성하는 중요한 물리적 공간인 하비루의 카페, 근대 공원에서 펼쳐진 당시 중국 지식인、문예인의 활동과 기록을 통해 그들이 중국을 프랑스와 같은 세계가 인정하는 문화강국으로, 상해를 파리와 같은 근대 도시의 모범으로 만들고자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金光洲의 문학작품을 통해 본 海港都市 上海와 韓人社會(동북아문화연구, 2011.03)
1910年 庚戌國恥는 한반도의 많은 지식인들을 국외로 밀어내어 동아시아 각국으로 이동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金光洲는 1929년부터 1938년까지 상해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국제적인 도시 상해의 본질을 식민지모국과 식민지를 연결하는 항구이고, “租界라는 그럴듯한 洋裝을 입혀가지고 코 큰 사람들의 歡樂場으로 제공한 한 가엾은 妖婦”와 같은 공간으로 인식하였다.
본문에서는 1932년부터 1938년까지 한국의 신문과 잡지에 발표된 김광주의 소설을 통해 술과 아편이 주는 歡樂에 빠져든 한인 지사들의 타락상, 혁명의 길에서 벗어난 후회, 죽음을 불사하고 투쟁하는 동지들에 대한 부채의식, 자신의 선택에 대한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초라한 자신에 대한 연민과 함께 상해에서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끊임없이 憂鬱에 빠졌던 상해 한인사회의 한 단면을 고찰하였다.

明의 海禁政策과 泉州人의 해상활동-嘉靖年間以後 海寇活動을 중심으로(역사와 경계, 2011.03)
명대는 중국고대 해상교통이 번성에서 쇠락으로 전변하는 시기였다. 본문에서는 해금정책이 실시된 이후 국가와 해항도시, 중앙조정과 지방권문의 길항관계 속에서 해항도시 천주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고찰하였다. 그리고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천주인의 해상활동이 중앙조정의 해양 정책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변화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중앙조정의 해금정책에 따라 한 때 세계최고의 해항도시라 불리던 천주는 급속하게 쇠락하였고, 밀무역 세력과 왜구의 침탈이 끊이지 않는 도시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해양성을 가진 천주인은 중앙조정의 해금정책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법을 어기고 바다로 나가 해적이 되고 해구가 되었다. 천주인들은 땅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혈연과 지연, 언어를 공유하는 동향인들을 조직하여 바다 위에 泉州幇과 천주네트워크를 건설하였다.

1920-30년대 한국문학에 나타난 上海의 공간표상(해항도시문화교섭학 재7호, 2012.10)
본 논문은 1920-30년대 한국문학작품 속에 나타탄 상해라는 공간을 프랑스조계와 공동조계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황포부두와 연결되어진 프랑스조계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민족진영의 주된 활동무대였고 문학작품의 주된 배경이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양수포부두와 연결된 공동조계는 민족진영의 인사들에게는 죽음과 공포의 공간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예수회신부 吳漁山의 「嶴中雜詠」을 통해 본 해항도시 마카오(대한중국학회 중국학 43집)
본 논문은 청대의 畵壇을 대표하는 “淸初六家” 중의 한 사람인 吳漁山(본명 吳歷)이 예수회에 입회하여 마카오 성바울대학에서 머무르며 지은 “오중잡영” 30수를 분석대상으로 하여 당시 마카오의 자연환경, 사람들의 생활, 동서양의 문화가 혼종 되어가는 마카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또한 遷界令이 해지되기 직전 특정시기(1680-1682)에 성 바울대학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중국지식인 오어산의 기독교학습과정을 살펴보고, 기독교 종교행사를 중심으로 한 서양문화가 마카오에 정착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이문화간 문화접촉에 따른 혼종의 모습 등을 살펴보면서 해항도시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발생하는 변용과 창조의 구체적 사례를 확인하였다.

澳門의 開港을 둘러싼 明 朝廷과 佛郞機의 갈등(대한중국학회 중국학 44집, 2013.04)
본 논문은 16세기 명나라와 포르투갈이 마카오라는 공간을 두고 펼친 접촉과 갈등의 관계를 고찰하였다. 명 정덕연간에 동남아 해역에 출현한 포르투갈인들은 중국의 오랜 조공국인 말라카왕국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중국과의 안정적이고 조직적인 무역활동을 위해 광주 懷遠驛을 찾아 조공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하지만 명나라 조정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불랑기에 대해 의심과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했고, 기나긴 갈등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澳門 - 마카오의 포르투갈인 거류지의 형성과정은 상대를 제압할 힘이 없었던 명나라 조정이 포르투갈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을 줄이고, 상대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넓혀나가는 과정이었음을 확인하였다. 명나라는 포르투갈을 조공국으로 포용하지는 못했지만 天朝의 땅 오문에 머물 수 있게 허락하였고, 관갑을 설치하여 포르투갈인의 내지출입을 통제했지만 결코 교역을 봉쇄하지 않았다. 포르투갈 역시 네덜란드와 같은 외부 침입자로부터 생활의 터전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성벽 건설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멸망하는 순간까지 그들의 안전과 기독교선교를 허용한 명나라 조정을 위해 봉사하였다.

청도 회천해수욕장과 도시민의 일상생활(해항도시문화교섭학 제9호, 2013. 10)
근대시기 서구로부터 해수욕장문화가 유입된 이후 청도인의 일상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본 논문에서는 청도 회천해수욕장의 탄생과정과 함께 청도인의 회천해수욕장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근대성의 학습공간, 여가와 일상생활의 공간으로, 현실인식의 공간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1930년대 문학작품을 통해 본 해항도시 청도(동북아문화연구, 2013. 6)
본 논문은 1930년대 국립청도대학과 국립산동대학에서 활동한 문인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해항도시 청도의 도시면모를 재구성하였다. 특히 "주중팔선"을 중심으로 국립청도대학의 작가군을 고찰하였고, 국립산동대학과 왕통조의 관계를 통해 1930년대 초반 청도의 모습을 고찰하였다.

동양의 런던, 근대 해항도시 상해의 도시 이미지
상해의 근대화와 도시화에 영국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모든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동양의 런던'이라는 이미지보다 '동방의 파리, 상해' 라는 이미지를 더 선호한다. 필자는 본 논문을 통해 영국이라는 대상을 두고 왜 역사적 평가와 도시 이미지 사이에 괴리가 발생했는가를 밝히고자 하였다. 논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다.
1. 중국인들은 1840년 아편전쟁, 남경조약, 상해의 개항과 조계의 설치 등 근대에 발생한 불행한 사건의 가해자가 영국이었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2. 대영제국의 자본을 대표하는 공부국이 공공건물, 은행건물, 양행건물들을 통해 상해에 런던과 같은 이미지를 구축하였지만 설계에서부터 실제사용에 이르기까지 엄격하게 종족 분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3. 특히 외탄에 건설되었던 만국공원 문앞에 설치된 "개와 중국인의 출입을 금한다"라는 푯말은 중국인들에게 불행한 근대사와 식민지화된 민족의 비애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때문에 1920-1930년대 중국인의 자본과 노력으로 일구어낸 상해의 경제적, 문화적 성장을 '동양의 런던'이라는 이미지와 결합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동양'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영국과 결합된 일본의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양의 런던'이라는 이미지는 중국인들의 환영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최치원의 시를 통해 본 9세기 황해항로
海雲 崔致遠(857∼?)은 9세기 바닷길을 통한 羅唐간의 문화교류를 대표하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한국 漢文學의 비조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때문에 최치원에 대한 연구는 문학, 철학, 역사 등 다양한 방면에서 진행되어 많은 성과물을 내고 있다. 하지만 그의 행적을 해양실크로드와 연관시켜 진행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다행히 최치원은 『桂苑筆耕集』卷20에 수록한 七言絶句 15수와 七言律詩 15수가 884년 10월 양주를 떠나 다음해 3월 신라의 왕도 경주에 도착하기까지 귀국길에 창작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본문에서는 최치원 선생의 『桂苑筆耕集』뿐만 아니라『孤雲集』등에 수록된 작품 중, 귀국시기에 지어진 시를 분석하여 그가 이용한 황해항로를 살펴보고 시에 드러난 최치원의 심경을 살펴보았다. 먼저, 황해항로의 西端 揚州에서 중국 동해안에 이르는 大運河 길을 통해 귀국을 즈음한 최치원의 복잡한 심경과 함께 강남지역의 사회상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는 항해에 필요한 순풍을 기다리기 위해 한겨울을 바닷가에서 보냈던 최치원의 시를 통해 항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종교와 삶을 유추하였다. 마지막 장에서는 황해항로에 대해 고찰하고 慶州의 모습을 통해 바닷길을 통한 문화교류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경제적인 측면이 강조된 남양해양실크로드와 달리 신라와 당을 연결하는 황해해로의 특징은 문화교류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어산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관한 고찰
吳漁山이라는 전통적인 중국지식인이 마카오 성 바오로학원에서 기독교 수사로서 생활하면서 창작한「天學詩」를 중심으로 기독교를 수용한 전통 지식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과정을 고찰하였다. 이와 함께 마카오에서 생활하는 서양 상인들과 그 가족들의 생활과 종교 활동을 살펴보고,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해항도시와 종교의 관계성을 살펴보았다. 특히 성 바오로성당 파사드 등 교회 건축물에 새겨진 종교적인 내용들은 대륙 내의 교회 건축물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특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해항도시 마카오가 단순히 물질적인 교류가 진행되는 공간만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와 사상이 전해지고 수용되는, 삶과 죽음과 같은 인간의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동서양의 토론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해항도시에서 진행된 종교와 사상의 교류를 통해 해양인문학의 성립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일제 강점기 安東을 통한 조선인의 이주와 기억(해항도시문화교섭학, 2017.04.30)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상징되는 한반도의 변경이란 국경의 끝과 시작이라는 물리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시사적 의의가 있다. 변경의 지대에는 제어의 끈이라든가 통제의 끈들이 내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곳이다. 그러하기에 제도로부터 핍박받는 민중들이 그러한 속박으로부터의 일탈 욕망을 강렬하게 느끼는 곳이다. 밀무역이라든가 월경의 풍경 등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곳, 쫓겨 가는 이주민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변경의 그러한 속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경도시[沿境]로서, 압록강을 끼고[沿江] 바다와 연결된[沿海] 변경의 해항도시 안동은 일제 강점기란 시대의 고민과 고통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매개체라 할 것이다. 본문에서는 1930년대 만주국이 건설되기 전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안동을 경유하여 이동한 조선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통해 변경도시이자 국경도시, 철도의 중심 도시, 특히 그동안 연구자들이 크게 주의하지 않았던 해항도시 안동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또한 조국의 광복을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압록강을 건넜던 민족 지사들을 통해 변경의 국경도시 안동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고찰하였다. 그리고 안동주재일본영사관부영사의 부인으로 안동에서 6년간 생활했던 여류화가 羅蕙錫이 남긴 글과 그림을 중심으로 안동의 조선인과 함께 중국인거리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일제 강점기 변경의 해항도시 단동은 삶의 긴장이 있고, 삶에 대한 치열한 탐색이 이루어지는 처절한 공간이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식민지 현실에 대한 암울한 인식이 있고, 조국 독립에 대한 해방의 의지가 꿈틀대는 곳이었다. 오늘날에도 단동과 도문에는 식민지 시기 변경을 건넜던 많은 동포들과 그 후예들이 생활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을 조선족이라고 부른다. 그들에게 있어 변경의 국경도시 단동은 더 이상 분단과 단절의 공간이 아니라 생활의 공간이며 이음과 상생의 삶의 공간이다.
*주제어: 안동, 신의주, 해항도시, 변경/국경도시, 나혜석, 해항문화

저서 및 번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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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항도시의 역사적 형성과 문화교섭(선인, 2009.08.31)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이 자유를 찾아 상해로 이주하게 된 원인은 상해가 조계지였다는 역사적 배경 및 교통의 편리성이라는 지리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상해는 50여 개 국가의 사람과 문화가 교류하고 공존할 수 있는 열린 공간, 공생의 공간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상해가 이주민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해항도시 상해가 갖는 경제적 우월성, 정치적 개방성, 문화적 포용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주는 상해라는 공간에 다문화가 공생할 수 있는 인적, 공간적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상해라는 공생과 혼효의 공간에 이주한 한국인들은 서구인들이 세워놓은 마천루와 백화점 극장 등 건축군들을 통해 서양의 물질문명과 움직이고 있는 서구 제국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각 대륙에서 이주해 온 각 이주민을 만나고, 그 속에서 새로운 학문과 전 세계 인민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사상과 아나키즘의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수사고신록(한길사 한길그레이트북스 105)
공자와 제자들의 행적에 덧씌워진 신화와 왜곡을 걷어내고 선진유학과 공자의 원형을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불후의 명작이다.

칭다오, 식민도시에서 초국적 도시로
이 연구는 경제관계가 심화되는 만큼 국가 간 대립이 첨예해지고 있는 오늘날, 해항도시를 방법으로 그 공존과 갈등의 역사적 근원을 규명하는 동시에, 타자간 관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책은 그 출발점으로 19세기 후반 역사무대에 등장해 지금까지 관계의 결절점에 자리한 중국 칭다오(靑島)를 선정하였다. 중심이 되는 시기는 칭다오를 거점으로 이동과 교섭이 활발했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까지와 개혁개방 이후이다. 상이한 메커니즘으로 작동되는 시대를 동시에 고찰하여 드러나는 지속과 변화를 통해, 교섭의 측면에서 동북아시아 해항도시의 가능성과 한계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해역아시아의 차이나타운華人街 -이민과 식민에 의한 도시형성-
제목 : 해역아시아의 차이나타운華人街 -이민과 식민에 의한 도시형성-
지은이 : 이즈미다 이데오 / 옮긴이 : 김나영, 안미정, 최낙민, 이명권, 김봉경
발행일 : 2014년 3월 31일 / ISBN : 978-89-5933-712-5 93300 / 출판사 : 도서출판 선인

해항도시 마카오와 상해의 문화교섭
마카오와 상해는 서로 다른 시기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인도양을넘어 대서양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의 결절점으로 기능한 해항도시였다. 각 해역의 해항도시와 연결된 네트워크를 통해 온갖 이문화가 교류하고, 혼종 되면서 마카오와 상해에는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졌다.해항도시 마카오와 상해는 중국의 종교와 지역문화를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과 외국 문화의 존재로 인해 중국 사람들에게 낯선해항도시의 문화를 건설한 것이다. 마카오와 상해라는 두 도시를 ‘해항도시’와 ‘문화교섭’이라는 개념을 얼개로 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게된 연유도 여기에 있다. 이 책에 수록된 10편의 문장에는 마카오와 상해라는 해항도시에서 펼쳐진 동서양의 문화교섭 활동이 담겨져 있다.

The Maritime Silk Road and Seaport Cities
The period when the maritime route was opened between Korea and China in the Yellow Sea was since the arising of the ancient nation. The necessity of a maritime route in the Yellow Sea is related to the mass transportation of freight. To properly understand the maritime route in the era of Koryo and Song Dynasty, it should be reviewed from the perspectives of the continuity of a maritime route and the use of the route.

Firstly, the traverse maritime route of Koryo and Song Dynasty in Yellow Sea was a successor of a maritime route that had been developed and used since the ancient times. Therefore, rather than uniformly classifying the maritime route of Koryo and Song Dynasty into the times of North Song and South Song, it is appropriate to view that the route had a main route and a sub route depending on the specific period. Typically in the case of the traverse maritime route of Yellow Sea, in the time of Koryo and Song Dynasty, the route travelled across Dengzhou of Song, which was used since the era of Silla until that time, or through Mizhou, or even went to South Song of Ningbo across the Yellow Sea.

Next, due to the growth of the Kitan in the time of Koryo and Song Dynasty, the southern route of Yellow Sea had been used as the main route since the year of 1088. Such fact is also described in detail in the like books of Koryo Dogyeong by Xu Jing. The reasons behind the development of the southern route of Yellow Sea include the economic development in the south region of the river in South Song and the need to sell various products in Koryo due to the aggressive trade policy of Song Dynasty.
However, other than the traverse maritime route and the southern maritime route of Yellow Sea, the southern maritime route that travelled via Jeju Island also had an important function in the time of Koryo and Song Dynasty. The island that belonged to Korea since the ancient times had an important location not only in the exchange between Koryo and Song Dynasty, but also in the exchange between Japan and Song Dynasty. Jeju Island was not only a travel stop in the route or the supplier of drinking water, but also functioned as part of the southern maritime route that travelled to South Song via Jeju. In special, this route was a route that received attentions as a maritime route for emergency or private trade.

Generally, the traverse route and the southern maritime route of Yellow Sea in the time of Koryo and Song Dynasty are understood in the way that the traverse maritime route of Yellow Sea was used but then the route was changed to the southern maritime route depending on the political and the diplomatic situations of the times of North Song and South Song. However, while the national envoys and public trades used fixed routes by changing them to reflect political situations, it should be seen that the merchants and the private trades still kept using the routes that had been used previously depending on their needs.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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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인문학 학술대회(2017.02.07)
일시: 2017.02.07 / 장소: 부경대학교
발표제목: 일제 강점기 安東을 통한 조선인의 이주와 기억

제7회 세계해양문화연구소협의회(WCMCI) 국제학술대회(2017.05.19-20)
일시: 2017.05.19-20 / 장소: 중국 상하이사회과학원 분부
발표제목: A Study of Jesuit Priest Wu Yushan’s Pastoral Activity in Shangh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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